체스터 (Chester)

 

영국 체셔주의 주도 역할을 하고 있는 인구 12만의 도시입니다​

역사적으로는 로마시대 영국의주요 군사 주둔지 중 한 곳이었으며 ,​ 로마 유적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영국에서 성벽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도시이며  올드타운에는 종세풍의 건물들이 많이 남아있는데요

체스터는 성을 뜻하는 지명이며 이 단어가 들어가는 지명으로 윈체스터, 맨체스터 등이 있다.

체스터는 영국에서 가장 성곽이 잘 보존된 도시 중 하나입니다.

중세시대 브리튼 로마(Roman Britain) 요새로서 사용되었고,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잘 보존된 성곽과 시계탑이 랜드마크처럼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아기자기한 크기의 건물과 동화같은 색감은 수원화성 구 시가지를 연상시켰습니다

월리엄 1세는 체스터를 기점으로 웨일즈를 침략하려고 했습니다.

체스터 이스트 게이트는 1768년에 지어졌으며 그 위에 시계는 1899년에 만들어졌다고 해요

이 건물들은 빅토리아 여왕이 재위하던 시절인빅토리아 시대 (1837년 ~ 1901년) 사이에

만들어진 건물들로 흑백으로 이루어진 건물들이라서 '흑백 르네상스'라고도 불린다고 해요

 

도시는, 전통적인 튜더 스타일의 집들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매력이 있다.

국내 TV 프로그램인 <비긴 어게인>도 이곳을 방문했다고 하는데,

이제는 영국에서도 흔하게 볼 수는 없는 양식인지라 꽤나 독특한 느낌이 있다.

이런 검은색 줄이 그어진 동화같은 집들이

도시 곳곳에 분포되어 있는 것체스터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다. 

 

도시는, 전통적인 튜더 스타일의 집들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매력이 있다.

국내 TV 프로그램인 <비긴 어게인>도 이곳을 방문했다고 하는데,

이제는 영국에서도 흔하게 볼 수는 없는 양식인지라 꽤나 독특한 느낌이 있다.

이런 검은색 줄이 그어진 동화같은 집들이

도시 곳곳에 분포되어 있는 것이체스터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다. 

이곳은  튜더양식의 건물로 이뤄진 거리로 1485~ 1603년의 튜터 왕조때 나온 양식으로

가빠른 지붕과 거대한 박공, 돌출창의 특징적인 건축요소가 있지만

무엇보도 half-timber framed wall 로 나무 골조가 밖으로 보이고 골조 사이를 진흙이나 벽돌로 채우고

스투코 기법으로 마감한 것으로  시골집같은 정겹고 예쁜, 그리고 마음을 한템포 늧춰주는 건물같다.

체스터 이스트 게이트는 1768년에 지어졌으며 그 위에 시계는 1899년에 만들어졌고

이 건물들은 빅토리아 여왕이 재위하던 시절인빅토리아 시대 (1837년 ~ 1901년) 사이에

만들어진 건물들로 흑백으로 이루어진 건물들이라서 '흑백 르네상스'라고도 불린다고 해요

체스터의 상징인 이 시계탑은 빅토리아(Victoria) 여왕 즉위 60주년을 기념하여 세워졌다는데

실제 제막식은 1897년이 아닌 1899년이었다고 한다.

* 체스터 이스트게이트 시계 *

로마 요새가 있던 입구 자리에 지어진 시계로 체스터의 랜드마크이자

영국에서는 빅벤 다음으로  사진이 가장 많이 찍힌 시계입니다

성벽 안쪽으로 뻗은 이스트게이트 거리(Eastgate St) 풍경.

옛 중세와 근세 양식을 잘 보존한 아름다운 건물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다.

참고로 이 길은 로마시대 군단기지 동문에서 사령부로 뻗은 도로와 일치한다.

* 체스터 대성당

체스터 성당은 660년 처음 색슨족의 교회로 지어져 875년에는 그 위에 체스터의 수호성인인

세인트 워버그의 유해를 모신 베네딕트회 수도원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1290년에 고딕양식으로 크게 개조되었고 수도원으로 이용되었으나 

1541년 헨리 8세의 의해 수도원 해산 명령으로 폐쇄되었다가 1870년대 복구공사를 거쳐

19세기 들어서야 옛모습으로 복구를 하여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 체스터 대성당

660년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설되었다가

여러번 개축이 된 이후 1250년 고딕 양식으로 재건된 대성당입니다

수도원으로 이용되었으나 1541년 수도원 해산 명령으로 폐쇄되었다가

1870년대 복구공사를 거쳐 현재의 대성당으로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체스터 시청

 

체스터는 영국에서 가장 성곽이 잘 보존된 도시 중 하나입니다.

중세시대 브리튼 로마(Roman Britain) 요새로서 사용되었고,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체스터 도시 성벽(City Wall).

체스터는 요크와 마찬가지로 로마 시대의 군단기지에서 출발한 도시로,

체스터라는 이름 자체가 성채 혹은 병영을 뜻하는 라틴어 카스트룸(castrum,)에서 기원한 것이다.

로마 정원

로마시대의 유적들

기네스 맥주 탄생지 더블린

더블린은 아일랜드 수도이자 최대 도시다.

게일어로 '단단히 다져진 땅'이란 뜻인 더블린은 988년 사람들의 정착이 시작돼 1998년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았다.

잉글랜드의 튜더 왕국이 들어선 17세기부터 빠르게 성장하며 한때 대영제국 도시들 가운데 둘째로 큰 도시가 됐다.

아일랜드가 1922년 영국에서 독립하면서 정식 수도가 됐다.

영문학사에 길이 남을 예이츠, 버나드 쇼, 사무엘 베케트 등 수많은 작가를 배출했다.

 

아일랜드를 대표하는 극작가인 오스카 와일드의 고향이자,

세계적으로 유명한 기네스 맥주의 탄생지이기도 하다.

흑맥주 기네스가 태어난 곳으로도시의 펍 어디에서나 기네스를 즐길 수 있다.

또 유네스코가 선정한 문학의 도시로 새무얼 베케트, 제임스 조이스 등 대문호를 배출했다.

트리니티 구 도서관, 아일랜드 국립 도서관, 마시 도서관 등 역사 깊은 도서관이 많으니 들러 볼 것.

음악을 사랑하는 국민성 덕분에 어디에서나 들려오는 음악은 이 도시를 더욱 매력적이게 만들어준다.

아일랜드 인구의 3분의 1 이상이 더블린을 고향이라고 부를 만큼 아일랜드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유럽에서 가장 젊은 인구가 살고 있는 현대적인 도시이자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학인 트리니티 칼리지가 있어 전 세계의 학생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더블린에는 중세 및 현대 건축의 조화로움과 역사적인 명소들, 세계적인 문학, 그리고 맛있는 맥주가 있다.

과거 세련된 바와 고급 레스토랑이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도시의 분위기가 세련되게 변화했다.

특히 그래프턴 스트리트(Grafton Street)와 그 주변의 쇼핑 명소, 레스토랑, 엔터테인먼트 명소들은

언제나 수많은 관광객들이 붐비는 곳이며, 현지인들이 많이 찾는 바와 펍에서 아이리쉬 맥주를 즐기거나,

다채로운 박물관과 갤러리에서 역사와 문화를 탐험하기 좋다.

 

도시는 풍부한 문화와 예술에 못지 않게 중세 성곽과 대성당, 제임스 조이스,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조지 버나드 쇼, 사무엘 베켓을 기리는 명판 등 풍부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산물들은 1,000여 년 전에 더블린이 성경을 생산하는 승려들의 안식처였을 때

시작된 것으로, 800년에 만들어진 유명한 켈스의 책이 그 결과물 중 하나이다.

이 책은 현재 아일랜드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인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만나볼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더블린 [Dublin, Du

 

더블린(Dublin)은 리피 강 어귀에 있는 아일랜드의 동쪽 해안에 자리 잡고 있다.

맥주, 문학, 음악을 한곳에서 즐길 수 있는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

Grafton street!!!

버스킹의 성지이자 쇼핑의 거리

명품샵도 많고 브랜드상점, 화장품, 백화점, 약국, 신발가게 등등 없는 게 없다.

 

아일랜드 더블린 시내 그래프턴 스트리트

더블린 시티 센터에 있는 그래프턴 스트리트는 조용하고 여유로움이 가득한 다른 곳과 달리

수많은 관광객들과 현지인들로 활기찬 거리이다.

거리에 펼쳐진 상점들과 카페들 사이로 바쁘게 걸어 다니는 사람들 틈을 거닐며

아일랜드 여행 중 오랜만에 대도시에 온듯한 기분이 들었다.

더블린의 '명동'이라 불리는, 그라프턴 스트리트

이 곳은 버스킹의 성지라 불릴 만큼 다양한 뮤지션들의 거리 음악, 예술 공연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영화 <원스>의 첫 씬에서 주인공이 버스킹을 하던 곳으로, 

또한 각종 상점가, 쇼핑몰들이 위치해있는 중심지로도 볼 수 있다.

더블린은 영화 원스(Once)의 촬영지로도 유명한데 특히 그래프턴 거리가 주 촬영지였다.

 

몰린 말론 동상 (Molly Malone)

아일랜드를 대표하는 민요의 주인공이라는 몰리 말론

더블린 거리에서 낮에는 생선을 팔고 밤에는 매춘부로 힘겨운 삶을 살아가다

젊은 나이에 열병으로 사망한 여인이라고 한다.

식민지 시절 아일랜드인을 상징한다고 하는데 중요한 인물인지는 모르겠지만

더블린 데이 투어를 할 때 만남의 장소로 사용되는 곳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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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플 바(The Temple Bar)
교사이자 철학자인 윌리엄 템플(Sir William Temple)이 1599년 영국 왕의 아일랜드 대리인으로 더블린으로 이주했다. 그는 이 지역에 집과 정원을 지었으며, 그의 아들인 존 템플이 현재 템플 바 지구의 개발을 승인하여 현재에 이르렀다고 한다.
바(Bar)는 원래 걷는데 사용하는 모래톱(sandbank), 즉 제방을 뜻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 가게는 특유의 붉은 색이 워낙 강렬해서 이 지역 어디서나 쉽게 찾을 수 있다.
낮부터 벌써 시끌시끌하다. 유럽이 대부분 그렇지만 여기도 낮술하기 좋은 나라다.

아일랜드 여행의 꽃, 기네스 맥주를 맛볼 수 있는 템플 바

기네스의 본 고장 아일랜드 더블린 여행에 빠질 수 없는 필수 명소이다.

'템플 바'는 더블린에는 800여 개의 무수히 많은 펍이 존재하지만,

그 중에서도 굳건히 유명세를 지키는 곳이다.

무대 위 가수들의 생생한 라이브 공연에 부드러운 기네스 맥주 한 잔 하기 좋은 곳이다.

아일랜드의 가수인 필 라이넛(Philip Parris Lynott)의 동상.

아일랜드 시민들의 자부심, 더블린 스파이어

원래 이 자리에는 넬슨 기념비가 서있으면서 시민들의 천대를 받고 있었는데

결국 부활절 봉기 50주년 기념 테러로 산산조각이 나게 되었다.

그 후 국제적인 공모를 통해 <스파이어>를 건설하였고

아일랜드인이 영국인의 국민소득을 추월한 시점의 상징물로 인식되기도 한다.

아일랜드 위스키, 제임슨 증류소 

178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아일랜드의 위스키 발상지로

자신만의 아일랜드 위스키를 블렌딩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는곳

기네스(Guinness)! 아일랜드를 모르는 사람도 기네스라는 이름은 모두 알고 있을 것 같다.
이 나라를 대표하는 맥주이자 기네스 북으로도 잘 알려진 이름이다.

 

 

 

런던 대영 박물관

영국 런던에 자리한 런던 대영 박물관입니다

세계에서 처움으로 1759년에 세운 영국의 국립 박물관으로 8백만점점의 방대한 숫자의 유물들을

소장하고 전시하는 박물관입니다

인류의 태동기로 부터 현대까지의 세계 모든 문명권의 역사및 문화가 전시되는 박물관입니다

 

기원전 196년경에 고대 이집트 유물인 로제타석

그리고 기원전 440년경에 고대 그리스 유물인 파르테논 신전의 대리석 조각들과

기원전 1300년경의 이집트 미라까지 다른나라의 수많은 귀한 유물들도 소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곳 대영 박물관의 출발은 내과 의사로 동시에 과학자인 한스 슬론경이 죽음을 앞두고

자신이 소장하던 8만여점의 방대한 숫자의 수집품들을 국가에 기증 하면서 박물관응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후로 대영박물관은 18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는 이집트와 그리스와 그리고 메소포타미아의 고대 유물들을

추가를 하였으며 세계각국에서 전리품과 함께 발굴 유물도 늘어나며 박물관의 건물을 증축하여

큰 규모에 세계적인 박물관으로 발전 하엿습니다

 

3층 규모에 전시관은 이집트와 그리스 그리고 로마와 서아시아와 동양 유물로 나뉘어서 전시를 합니다

또한 하이테크 건축에 대가로 유명한 노먼 포스터가 설계한

그레이트 코트도 박물관에서 색다른 볼거리의 하나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Westminster Abbey)

사원은 960년경에 베네딕토회 수도자들을 위한 공동체에서 시작하여,

1042년 참회왕 에드워드가 그 자리에 새 교회를 짓기 시작하였고,

13세기부터 16세기까지 고딕양식으로 지어졌다.

길이 1백56m 너비 61m 그리고 높이 31m로 규모에 있어서도 세계적이다.

특히 서쪽 정문 위의 2중탑은 볼수록 장중하기 비길 데 없다.

당연히 원래는 카톨릭 소속 성당이었으나, 헨리 8세의 종교개혁이후 성공회로 넘어 왔다.

 

영국왕의 대관식, 결혼식, 장례식 등 주요 행사가 열리는 곳이자

대부분의 영국왕들은 물론  워즈워스나 뉴턴 같은 유명인들이 묻혀있는 곳이기도 하며,

세인트폴성당과 함께 영국을 대표하는 유서 깊은 성당이며,

한마디로 영국의 전통과 문화가 고스란히 간직된 장소라고 할 수 있겠다.

수도원중의 수도원이라는 의미로 ‘The Abbey’로 불리기도 한다.

 

웨스트민스터 대성당과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다른곳에 위치해 있어요

수도원 중의 수도원’ 이라는 의미로  ‘The Abbey '라고 불린답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13세기에 헨리 3세가 헨리 오브 레인즈에게 설계를 맡겨 당시 프랑스에서 유행했던  고딕양식으로 완성 되었으며' 

런던에 있는 유명한 고딕양식의 대성당으로 . 영국 왕과 위인들이 잠든곳 이에요

1066년 정복자 윌리엄을 비롯해 엘리자베스 2세에 이르기까지

역대 왕의 대관식이 있었으며 또한 이곳에서 묻혔다고 합니다

1997년에는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장례식을 치렀다고 합니다

왕실과 주요 행사가 열리는 곳이며 윌리엄 왕세손과 캐서린 미들턴의 결혼식이 있었다고 합니다

영국 최고의 고딕 양식 성당인 웨스트민스터 사원.
참고로 '웨스트민스터 성당(Westminster Cathedral)'과는 다른 건물이니 헷갈리면 안된다.
'웨스트민스터'라는 명칭이 붙는 건축물은 1)궁전, 2)사원, 3)성당 이렇게 크게 세가지라고 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장소인 웨스트민스터 사원 안에는,
헨리 7세, 메리 그리고 엘리자베스 여왕 등 영국의 역대 왕들과
아이작 뉴턴, 찰스 다윈, 제프리 초서 등 영국을 대표하는 과학자, 사상가, 문학가, 정치가들이 잠들어 있다.
또한 이런 이름난 위인들 이외에도 무명용사의 묘가 성당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사원 
런던에 있는 유명한 고딕 양식의 대성당.

영국 왕가의 대관식 및 매장용의 성당. 주로 헨리 3세(HenryⅢ, 재위 1216~72)에 의하여

1245~69년에 건설되어 초기는 영국식이었으나 프랑스 적인 요소도 비교적 농후하게 가미되었다.

동단부에 정묘하고 화려한 부채꼴 볼트로 유명한 헨리 7세 예배당(1503~19)이 부가되었다.

서정면(西正面) 하부는 15세기 이후 창건되어 18세기 초기에 폭스모어에 의하여 개조되고

스모어가 1739년경 첨가하였다.

당내에는 역대 국왕과 왕비, 영국의 대표적인 정치가, 예술가, 과학자의 묘비가 있다.
참고: [네이버 지식백과] 웨스트민스터사원  [Westminster Abbey]

 

영국 왕과 위인들이 묻혀 있는 역사적 장소 .왕실과 주요 행사가 열리는 웨스트민스터 사원

영국 민주주의 상징인 국회의사당과 빅벤    Houses of Parliament (Big Ben)

왼쪽 뽀족한 시계탑이 빅벤. 빅벤옆 건물이 국회의사당(웨스트민스터 궁)

 

웨스트민스터 대성당 (Westminster Cathedral)

네오비잔틴 양식의 로마 카톨릭 성당  영국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대교구의

주교좌 성당으로 잉글랜드와 웨일스에서  가장 큰 가톨릭 교회이며

종교개혁 이후에 영국에 세워진 첫 번째 가톨릭 교회라고 합니다

1995년 영국 여왕인  엘리자베스 2세가 방문해서  예배에 참석 하였다고 합니다

헨리 8세 이후 영국의 왕들 가운데 현역 군주로는 처음으로 가톨릭 의식에

공식 참가한 것이 화제가 되었다고 합니다

 

화려하고 특색있는 외관과  전면에 90미터 높이의 커다란 시계탑이

솟아 있으며 성당 입구의 아치와  기둥의 조합도 화려하고 아름답습니다

영국 런던의 웨스트민스터에 있는 마 가톨릭교회의 주교좌 성.

1895년 착공하여 1910년 헌당한 비잔틴 양식의 건물로 영국 잉글랜드와 웨일스 지역 로마 가톨릭교회의 중심지이다.

인근의 성공회 교회인 웨스트민스터 사원과는 구분된다

19세기 후반에 들어와 영국 성공회와 교황청의 관계는 개선되었고, 새로이 웨스트민스터 성당이 1903년에 건축되었다.

영국에서 종교개혁이후 최초의 카톨릭 교회로 여겨지는 웨스트민스터성당은 네오비잔틴양식으로 세워져 매우 화려하고 특색있는 외관을 하고 있으며 입구의 아치와 기둥의 조합도 화려하고 아름답다.

성당의 길이는 110m이며 폭은 47m이고, 외부 종탑의 높이는 87m에 이른다.

외부는 붉은 벽돌과 흰 대리석으로 꾸며졌으며, 내부의 기둥과 벽은 형형색색의 대리석과 모자이크로 장식됐다.

특히 제단 주변과 여러 경당은 화려한 모자이크로 꾸며져 아름다움을 더한다

.

 패트릭 성당(St. Patrick’s Cathedral)

아일랜드 더블린 성패트릭성당 아일랜드 에서 가장 큰 성당으로

국가의 공식적인  종교 행사를 치르기도 한다

성패트릭 성인의 이름을  딴 성당 이곳은 아일랜드에 처음 그리스도교와  로마글자를  

전파한 인물로 수호성인 이기도 한 그의 이름으로그를  기리기위해 지어졌다

 

보통 3월 16일에서 18일 에 이날에는 온나라 전체가 모두 초록색으로 물든다고해요

셔츠,양말,넥타이꽃,리본 케익 모든것이 초록색으로 치장되는데

전세계적으로 아일랜드 이민자들이 모인곳 미국,캐나다 등등  

어디든 명절을 즐기는 이들로 온통 거리가 초록색으로 물든다고 하네요

아일랜드 는 초록옷을 입고 최고의 명절을 지내는 날이 있어요

 

아일랜드의  기독교를 처음으로 전파한 성 패트릭의  사망을 기리는 날인데

성직자로 추앙을 받을 뿐만 아니라 영웅이기도한 그를 기리는 행사로는 

 삼위일체를 설명할때   초록의 클로버를 사용했다는 전통으로

클로버는 성 패트릭날의 전통 이다

성 패트릭

라틴어로는 ‘파트리키우스(Patricius)’, 영어로는 ‘패트릭(Patrick)’

 이탈리아어로는 ‘파트리치오(Patrizio)’,

 아일랜드어로는 ‘파드라그(Pádraig)’라고 한다.

아일랜드에 기독교를 전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서 ‘아일랜드의 사도 라고 불리기도 한다.

아일랜드의 수호성인 가운데 한 명이며, 기념일은 3월 17일이다.

 

영국 웨일즈의 한 성직자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16세에 아일랜드 해적들의 습격을 받고 끌려가 6년 동안 노예로 지냈다.

그는 아일랜드 언트림 슬레미시 산에서 양을 치면서 지냈는데, 포로로 잡혀있는 동안 그리스도교에 귀의하였다.

그 후, 어느 날 꿈속에서 천사가 나타나 집으로 가도록 도와주었는데,  320km 이상을 걸어가

아일랜드 해협을 배로 건너 고향 웨일즈로 갔다. 그는 영국으로 가려 했으나 도착한 곳은 프랑스였다.

그는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신학을 공부하여 신부가 되었다.

패트릭은 1883년 하느님의 부름을 받고 성직자가 되어 자신이 노예로 있던 아일랜드로 돌아가, 

그리스도교를 전파하면서 우물가에서 성수를 찍어 세례를 주었다.

그의 노력으로 섬 안의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교를 믿게 되었으며, 

그는 평생 그곳에서 성직자로 봉사하고 영웅으로 추앙되었다.

지금도 아일랜드에는 그의 이름을 딴 교회들이 60개가 넘는데, 가장 유명한 곳이 바로 더블린의 성 패트릭 성당이다.

지금도 더블린 시민의 90%가 가톨릭신자이다.

더블린 시내 중심지역에 위치한 성 패트릭 성당은 패트릭 성인이 AD 450년 아일랜드에 머물던 때에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사람들에게 세례를 행했던 우물가에 세운 교회이다.지금도 성 패트릭 공원에 있는 성당 옆에는 그 우물터였던 유적이 있다.

성 패트릭 성당은

초기 영국의 고딕 양식 건축물로서 아름다운 조각과 화려한 바닥 타일,화려하고 멋진 스태인드 글라스로

꾸며진 창문들로 장식되어 있다   .한국은 교회와 성당의 구분이 뚜렷하지만,

유럽은 규모와 크기에 따라 교회의 규모에 따라 chaple < church < cathedral < church cathedral로 나뉜다.

 

 

기네스가 의 벤지민 기네스경 동상

헨델의 메시아 초연 당시 파이프 오르간

1742년 헨델이 메시아를 조지 프레드릭 헨델 호텔에서 초연할 당시, 

사용한 파이프 오르간을 보관하고 있다

성당 내부에 있는 화해의 문

1492년 명문가문인 킬데어(Kildare)()와 오먼드(Ormond)()의 불화가 심해지자

오먼드가의 백작인 제임스 버틀러 경과 그의 가족들은 이 성당 안으로 피신을 했다.

성당 밖에서 포위하고 있던 킬데어의 백작 제럴드 피츠제럴드는 화해를 시도했지만,

오먼드가는 킬데어가의 진의를 믿지 못하여 성당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피츠제럴드는 자신의 진의를 보이기 위하여 성당 문에 구멍을 내고 그 안으로 자신의 팔을 집어넣었다.

그러자 버틀러경은 피츠제럴드의 손을 잡으며 두 집안이 화해를 하였다고 한다.

 

펴 옴

세인트패트릭은 누구인가?

성 패트릭이 아일랜드에 선교할 당시 아일랜드에는 켈트족이 살고 있었다.

문명화된 로마인들의 기준으로 보면 아일랜드에 사는 켈트족들은 야만인이나 다름없었으며,

로마 교황청은 켈트족의 선교는 불가능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성 패트릭은 아일랜드 원주민에 대한 편견에 굴하지 않고 켈트족을 선교하기 시작했다. 

성경 속 인물에 대해 켈트족의 성향에 맞춰 아주 쉽고 재미있게 들려주며 가톨릭을 널리 전파했다.

예를 들면, 하느님의 교의인 삼위일체(三位一體; 성부(聖父) · 성자(聖子) · 성령(聖靈)의 세 위격(位格)이

동일한 본질을 공유하고, 하나의 실체인 하느님이라는 교의 를 설명할 때,

잎이 세 개인 ( 토끼풀)에 비유해 원주미의 이해를 도왔다. 

오늘날 아일랜드를 비롯해 아일랜드계 이주민이 많이 살고 있는 미국ㆍ오스트레일리아 등의 지역에서는

그가 죽은 3월 17일을 ‘성 패트릭의 날(St. Patrick's Day)’로 정해서 기리는 행사가 성대하게 벌어진다.

이 날에는 사람들이 초록색 옷을 입고 세 잎으로 된 토끼풀 모양을 가슴이나 모자 등을

붙이고 행사에 참석해 행진 등을 벌인다.

이것은 성 패트릭이 토끼풀의 세 잎을 보기로 들어서 삼위일체 교리를 설명했다는 일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이것을 샴록(Shamrock) 이라고 불러요.

성 패트릭은 기독교를 전파할 때 샴록으로 삼위일체를 설명했다고 해요.

아일랜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셀틱 십자가(Celtic Cross) 

걸리버 여행기로 유명한 조나단 스위프트도 성패트릭성당의 사제였다고 한다.

<걸리버 여행기>를 쓴 소설가이자 성당의 주임 사제였던 조나단 스위프트와 그

의 연인이었던 스텔라의 묘지와  켈트족의 묘지 등이 있다.

걸리버 여행기 1726년에 출판된 『걸리버 여행기』도 어린이를 위한 동화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nbsp;인간과 인간사회에 대한 풍자,&nbsp;특히 영국의 아일랜드에 대한 착취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솔즈베리 대성당의 정식 명칭으로, 솔즈베리의 동정 성모 마리아 주교좌 성당으로

영국 잉글랜드 윌트셔주 솔즈베리에 위치한 잉글랜드 성공회의 대성당이다. 

잉글랜드 성공회 솔즈베리 교구의 주교좌 성당으로,

첨탑의 높이는 123m로 영국에 위치한 대성당 중 가장 높다.

1220년부터 1258년 사이에 건설되었다.

이곳에는 잉글랜드에 현존하는 4부의 마그나 카르타 원본 중 가장 상태가 양호한 1부와,

1386년에 제작되어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기계식 시계가 있다.

 

솔즈베리 대성당과 마그나 카르타 보관소( Magna Carta Chapter House) (구글 위성사진 캡처)

 대성당의 주 첨탑

 

 

대성당 뒤쪽의 뜰. 분할된 창문 문양으로 고딕의 특징이 드러난 이 중정을 따라 마그나 카르타 보관소로 간다.

솔즈베리 대성당의 주제단부에서 바라본 모습. 

성당 내부는 높고 웅장하며 강인한 고딕의 장식들이 통일감 있게 구성되어 있다.

좁고 긴 아치형 스테인드 글라스 창문, 3단으로 구성된 네이브 월(Nave Wall),

화려하게 장식된 예배당들과 성가대석, 파이프 오르간 등이 눈길을 끈다.

좁고 긴 아치형 스테인드 글라스 창문

레이디 채플(Lady's Chaple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된 예베당 )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기계식 시계라고 한다.

 

 마그나 카르타는 성당 안쪽의 뜰을 따라 나 있는 중정을 통해 갈 수 있는 별도의 장소,

The Great Chapter House에 보관되어 있다.

원본은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고 열람만 가능하다.

2018년 10월, 40대 중반의 남성이 마그나 카르타가 보관된 유리 박스를 해머로 내리쳐 탈취하려 했던 사건이 있었다.

원본에 손상이 발생하지는 않아서 2019년 초부터 다시 전시가 시작되었다. 

솔즈베리 대성당에는 특이한 볼거리가 있는데 바로 <마그나 카르타>이다

마그나 카르타의 원본 4권중 1권이 이곳에 보관되어 있다

1215년 영국의 존 왕이 프랑스 내 영지 상실과 전쟁의 패배, 국가 재정 악화 등 잇따른 실정을

하게 되고 귀족에 대한 과세까지 하게 되었다

 

이에 불만이 쌓인 귀족들과 런던시가 존 왕의 권한을 제한하는 각서를 강요하였고 존  왕이  서명한 것이다

각서의 내용은

 1.   교회는 국왕에게 자유롭다

2.   왕의 명령만으로는 전쟁 협력금 등의 명목으로 징세할 수 없다

3.   런던과 다른 자유시들은 자체적으로 관세를 정한다 4. 왕은 정해진사안에서만 의회를 소집할 수 있다

5. 잉글랜드 자유민은 법이나 재판 없이 자유, 생명, 재산을 침해받지 않는다

 

내용 자체는 관례적으로 내려오던  관습법이었지만 최초로 문서화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당시에는 별로 알려지지도 않았고  중요하지도 않은 문서였다고 한다

 

당시는 교황권이 가장 강했던 시기였고 이 소식을 들은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말 한마디에 마그나 카르타는 무용지물이 되고 존 왕은 권한을 계속 유지했다고 한다

이것이  재조명된 것은 17세기 국왕과 의회가 대립하던 시기에 에드워드 코크 등의 재판장들이

이 대헌장을 연구하여 법치주의 개념을 확립했다고 한다

또  이 과정에서 원래 귀족의 특권을 주장하던 것이 평등사상과 법치주의를 옹호하는 방향으로

 해석되었고 이들 사상을 정립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현재  이  대헌장이 따로  헌법이  없는 영국에서 헌법과 같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스톤헨지 (Stonehenge)

영국 여행을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역시 런던이고 런던하면 떠오르는 것은 빅 벤일 것이다.

두번째로 유명한 것을 고르라고 하면 누구나 주저없이 스톤헨지​를 고를 것이다

현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스톤헨지는 기원전 약 2000~ 1500년경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이 거석들의 목적 및 용도에 대해서,

그리고 누가 어떻게 만들었는지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

예전부터 영국인들은 스톤헨지의 기원, 용도 및 목적에 대해서 궁금해하였다.

일각에서는 종교적인 제단의 역할을 하였다고 주장하며, 다른 가설로는 '죽은 자를 위한 성역'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주로 종교적 공간으로 추정해서인지,

건설시 위대한 선지자를 제공하는, 종교와 관련된 불가사의로 구현되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태양력 계산을 위해 사용된 도구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그리고이 돌 무더기를 스톤헨지라고 하는데 누가? 왜? 이렇게 부르기 시작했는가?

 

스톤헨지는  고대 앵글로색슨어로'공중에 매달린 바윗돌'이라는 의미다
돌을 의미하는 '스탄(stan)'과 돌쩌귀를 의미하는 '헹그(hencg)'라는
고대 영어 단어에서 유래한 말이다

옷을 걸치는 것조차 잘 몰랐던 야만인인 고대 브리튼 사람들이
건설했다고 보기에는 스톤헨지의 건축양식이 너무나도 훌륭했기때문이라고 한다

그 후 스톤헨지를 드루이드 승려들이건설한 성소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드루이드 승려들은 기독교가 전파되기 이전인 기원전 14~13세기에
나타나 고대 프랑스, 영국, 독일 등지에널리 퍼져 있던 켈트인의 종교를
관장하던 신관들이었다고 한다

약 BC3000년 경부터 몇차례에 걸쳐 세워진 스톤헨지는 선사시대의 유물로서 BC 1250년 경에 완공되었다.

거대한 돌을 깍고 이 곳까지 운반하여 세운 규모를 생각하면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어

수세기에 걸쳐 만든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 곳에서 발굴된 유물은 솔즈베리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스톤헨지에 대해서는크게 3가지 설이 있다고 한다

첫째, 고대 외계인이 만든지구 기지라는 설이다
또 다른 형태의 미스터리 서클은 아닐까하는 추측도 있다

둘째, 마법사들이 마법으아일랜드에서 돌을 옮겨와 만들었다는 설이다
사람의 힘으로 옮기기에는 돌의 양과 무게가 엄청났기 때문에
평범함을 뛰어넘는 힘에 기대지 않고는 불가능하다고 보아이런 주장이 생겨났을 것이다
셋째, 사람들이 만들었다는 설이다
그러면 사람들이 어떻게, 무슨 목적으로 만들었는가?

원의 북동쪽 방향에는 힐스톤 (Heelstone)이라는 돌이 놓여 있는데,

스톤헨지에서 빼놓을 수 없는 방향표시석 힐스톤은동쪽을 가리키는데

그것은 하지에 해가 뜨는 방향을 정확히 나타내고 있다

 

무게30톤의 힐스톤

스톤헨지는 셰일 서클이라고 불리는 바깥쪽 원과, 블루스톤 서클이라고 불리는 안쪽 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바깥쪽의 원은 30m 크기의 열석이 30개가 있었으며 그 위에는 순석이 있었지만 현재 17개만 남아있다.

안쪽 원은 23m의 열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돌들은 모두 최소 25km 이상의 거리에서 운반한 것으로 추정 된다.

높이 4미터, 무게 25~30톤의 거대한 돌을 원형으로
늘어 놓은 형태는 선사시대의 입석 유적들중 아주 특이하다고 생각되었다

돌기둥들은 그리스 신전의 기둥들처럼 가운데 부분이 볼록하게 되어 있었는데
원근법의 영향을 감안하여 밑에서 올려다볼 때
기둥이 직선으로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 였다고 설명을 들었다

17세기 초 제임스 1세는 스톤헨지를 보고 흥미를 느껴
건축가 조운즈에게 조사하도록 명령했다고 한다
조운즈는 스톤헨지에서 로마식과 이탈리아식의 기둥배치 방식을
확인하고 고대로마인들이 건설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스톤헨지는 엄밀한 의미에서 고인돌과 같은 거석유물로 분류하지만
그리스 신전과 같이 중앙 집중적인 배치방식으로
공간을 한정했다는 점에서 건축물로 간주할 수 있다고 했다

고대로마의 유적지 로만바쓰

 
바스(Bath)는 이름 그대로 천연온천으로 유명한  영국의 대표 휴양지이다.
1세기에 영국을 점령한 로마인들은  이곳에 로마식 온천탕과 사원을 세웠고
지금도 로마의 목욕탕이 잘 보존되어 있는 유적지로서 
로마 시대 유적과 18세기 신고전주의 양식 풍의 독특한 건축물들로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곳이다

로마인들이 떠난 후, 쇠락했다가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영국의 부유층이 선호하는 세련된 요양과
사교의 도시로 거듭나게 된다.

18세기는 영국이 크게 번영한 시대로, 새롭게 부를 형성한 중산층도 휴식과 오락, 사교를 원했고, 
그 장소로 바스가 떠오르면서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며
소설가, 극작가 등 많은 문인들도 바스를 찾게 되면서
바스는 18세기 문학 작품에도 자주 등장하는 명소가 되기도 했다

 
  
도시의 이름인 바스(Bath)는 이름 그대로 목욕을 뜻하는데, 이 곳이 목욕시설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켈트족이 거주하던 영국 브리튼 섬에, 로마 카이사르가 침공하면서 로마의 영토가 된다.

이 로만 브리튼 시기 로마인들이 이 도시의 온천 주변에 목욕시설과 사원을 지으면서

당시 로마인들의 휴양지로 여겨졌었다.

 

이시기의 도시를 현재에는 '로만 바스(The Roman Baths)'라고 부른다.

이후에도 이 도시는 물과 관련되는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고, 16세기 지금의 이름인 '바스'로 정해지게 된다
로만 바스(The Roman Bath)는 로마인들이 철수하는 4세기까지 운영되다가,

이후 17세기에 영국 귀족들의 휴양지로 다시 개발되게 된다.

제인 오스틴을 포함한 영국의 유명인들은 이 도시에 거주하면서 요양과 휴양의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바스의 대욕장(Great Bath)유적은, 중세시대와 산업시대에 증축되어,

지금 볼 수 있는 모습은 4세기때의 모습과 다른 형태이다.

 

Bath Abbey는 영국 서머셋의 Bath에 있는 전 베네딕토 수도원이며 영국 교회의 교구 교회이다.

7세기에 설립되었고, 10세기에 재건되었으며, 12세기와 16세기에 또다시 재건되었다. 
973년에는 바스수도원에서 Edgar왕이 즉위식을 올리기도 했고 이때부터 앵글로 색슨인들이

Baoum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오늘의 바스라는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1860년대에 조지 길버트 스콧 경에 의해 주요한 복원 작업이 행해졌으며,  이는 서양에서 수직 고딕 건축의 가장 큰 예들 중 하나로 손꼽힌다.

중세 수도원 교회는 때때로 주교의 성당 역할을 했다.

바스는 상류층들의 유원지였고, 많은 미혼남녀들이  무도회를 즐기면서 결혼상대를 몰색했다고 한다.

18세기초 결혼과 연애에 대해 쓴 제인오스틴 작품의 단골 배경이 바스이다

<레 미제라블> 영화에서 자베르가 자살하는 장면에 나왔다는 풀트니 다리(Pulteney)가 나온다.
마치 작은 폭포처럼 주변에 와류가 생기는 모습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이 대욕장은 20세기에도 운영되는 등 비교적 최근까지 사람들이 이용했지만,

수질 문제가 발생한 이후 물에 들어가는 것은 금지되었다고 한다.

대신 인근에 현대적 스파 시설이 몇개 있다.

도시 바스는 현재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지정되어 있다.

 
 

로얄 크레센트( Royal Crescent)

이곳은 <로열 크레센트>다하늘에서 내려다보면초승달'모양과 닮았다고 해서붙여진 이름이다
1767년부터 1774년까지무려 7년에 걸쳐만들어졌다고 한다
길이 180m30채의 집들이
곡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바스(Bath)에서 생산되는 석재를사용하여 만들었으며114개의 이오니아식 둥근 기둥으로이루어진 멋진 대저택이었다
귀족들과 부유층들에게대저택을 대여해 주거나수많은 예술가들이 머물던 장소로
사용되었지만 지금은박물관과 호텔 용도를 사용되고있다고 한다

바스 수도원(Bath Abbey)은  로만 바스 근처에 있는 고딕양식의 수도원으로 후기 중세시대에 세워졌다.

 

 

 

 

제인 오스틴이 1809년부터 1817년까지, 8년간 머물렀던 생가. 현재는 박물관으로 개조되어 전 세계의 오스틴 팬들을 맞이하고 있다. 바스의 제인 오스틴 센터가 2차 창작물 위주로 꾸려져 있다면, 여기는 유품 등 좀 더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전시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제인 오스틴 센터 Jane Austen Centre
바스에는 많은 예술가들이 살았는데
[오만과 편견]의 작가 제인 오스틴도 그중 한 사람으로
1801년 부터 1804년 까지 이 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여인의 동상이 서 있는 집은영국을 대표하는 여류 작가로
[오만과 편견]을  쓴<제인 오스틴> 기념관이다

1801년부터 5년 동안바스에 머물렀다고 한다

제인 오스틴은  가난한 중상류층으로 지참금이 없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지 못하고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좋아하는 책을 늘 가까이하며  재능을 발휘하여 글을 쓰고
여행을 즐기는 삶을 살다가 42세에 세상을 떠났다

결혼을 하지는 않았지만 남녀간의 사랑, 밀당을너무도 잘 표현한 작품을 남겼다고 한다


편견은 내가 다른 사람을사랑하지 못하게 만들고,
오만은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할 수 없게 만든다
-제인 오스틴, 오만과 편견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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