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적인 해수관음성지 보문사(普門寺)

강화도 서쪽의 석모도라는 섬에 있는데,

양양 낙산사와 금산 보리암과 함께

우리 나라 3대 해상 관음  기도도량으로 널리 알려진 사찰입니다.

신라 선덕여왕 때 지어진 사찰로 역사만 놓고 보면 천년을 이어오고 있는 절입니다

 

낙가산 보문사 일주문

 

 

 

 

 

 

보문사는 635년(선덕여왕 4년)에 창건했다고 하며,

전설로는 이 마을에 살던 어부가 그물을 쳤는데 물고기는 잡히지 않고 바위와 돌 22개를 올렸는데

꿈에 스님이 나타나서 일러준대로 현재의 석실에 봉안했더니

석가모니부처님과 관세음보살등 불상4기와 18나한상이 되었다고 합니다.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인 조계사의 말사로서

소원을 비는 많은 불교 신자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국 33관음성지중 제1호 보문사라는 표지

33관음 사리탑의 뒷편을 둘러 감싸안듯 오백나한이 모셔져 있습니다

.

 

 

 

 

 

와불전 과오백나한 

 

와불전은 천안대 뒤에 조성된 전각이다.

 천안대는 길 40m, 폭 5m의 큰 바위로 법회 때설법하는 장소로 사용되었고,

 그 크기가넓어서 천명이 않을 수 있다고 하여"천인대"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와불전은 열반 당시 모습의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셨습니다.
전체 신장이 10m이고, 열반대는 13m로 그 규모가 상당하다 하겠습니다

 

 

 

 

 

보문사의 중심에 극락보전이란 법당이 있습니다.

 석가모니불을 모신 대웅전과 달리 중심에 아미타부처님을 모신 법당을

극락전 또는 극락보전이라고 부른답니다.

 

 

 

 

 

 

 

 

 

 

 

 

보문사 석굴석굴사원의 예는 경주 석굴암, 경북 군위의 삼존석굴, 강원도 속초의 개조암 정도로우리나라에는 몇 되지 않는 귀중한 예입니다.일화에 따르면 창건 후 14년 뒤인 649년 신라 선덕왕 때 어부들                       그물에 걸려 올라온 석불상들을 이곳 동굴에 안치하였다고 하였으므로  곧 그때부터 석실이 조성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석실앞에는 오래된 향나무가 있는데

 6.25동란때 거의 죽었다가 3년뒤에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관음보살의 성지로 유명해서

예전에는 아주 큰 규모를 자랑하는 법당이라 수도 정진하는 스님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한 300명 정도의 스님들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때 이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때 사용했던 맷돌이라고 하네요

 

 

 

이 석굴에서 기도하면 효험이 뛰어나다고 알려지면서

마애불과 함께 불자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천연동굴을 확장해 만든 석실의 입구에는 세 개의 홍예문이 있다.

 이 문을 통과하면 기도를 올리는 불자들 앞으로 작은 나한상들이 모셔진 불단이 보인다.

 

 

 

 

 

   멀리 마애불상이 모셔진 눈섭바위가 보인다.

 

눈썹바위와 마애불

 

낙가산 중턱에  앉아 있는 이 불상은 눈썹 모양의 화강암 바위 아래 새겨진 관음상이다.  

 

한가지 소원은 이루어준다는 낙가산 관세음마애불상 가는 길. 계단의 갯수가 419계단

 

 보문사 마애불은

보문사가 관음 도량의 성지임을 상징하는 성보 문화재 로서

 마애 관음 좌상이 낙가산 중턱의 눈썹 바위의아래 새겨져있다

높이 920cm.너비 330cm달하는 거상이다

또 부처님 얼굴에 빠짐없이 있기 마련인 백호도 이마  사이에 솟아있다

 가슴에는 만자가 새겨져있다

 

이곳에서 정성으로 기도드리면 이루어 지지 않는 소원이 없다하여 

 지금도 신도들의 발걸음이 끊어지지 않고있다

 

 

 

 

용왕단
서해 바다의 탁트인 시야가 한눈에 들어오는 용왕단에서는각자의 소중한 발원을 담아 소원지를 써서 유리병 속에 100일간 보관을 합니다.
100일이 지난 후 용왕단에 보관된 소원지를 꺼내 스님들께서 축원을 하고 소전을 하게 됩니다.
  이곳은 전망이 좋아 사진도 찍고 잠시 쉬면서 숨을 고르는 장소입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서해의 낙조가 일품이라고.... 

 

 석모도

강화도 외포리에서 1.5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지만,

 외포리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한다.

 

 

 

 

 차량을 함께 수송할 수 있어 차를 타고 들어갈 수도 있다.

 

 

 

 

 

 

 

 

 

 

 

 

 

 

강화도 순무김치는  임금님께 진상했다고 합니다

역사의 숨결이 살아있는 강화도 역사탐방 

 

일시  :     2014년 .10월23 - 24일(1박2일)

인원   :    40명

탐방코스  : 전등사. 보문사(석모도).역사박물관..고인돌.고려궁지.용흥궁.

                평화전망대. 광성보. 마니산첨성단

강화도는

섬 자체가 우리나라 역사의 축소판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선사 시대의 고인돌 유적부터 단군왕검의 얼이 담긴 마니산, 고려 때의 대몽항쟁과 팔만대장경 조성, 

서양 세력과 처음으로 전투를 벌였던 ‘병인양요'에이르기까지 강화도의 역사는 

곧 한민족의 역사나 마찬가지였다.

강화도에는 전등사, 보문사 를 비롯해 유서 깊은 사찰도 많이 터 잡고 있다.

 

 

전등사(傳燈寺)

 

전등사는 고구려 소수림왕 11년 약 1600년전 아도화상께서 최초로 창건한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고찰로서 사적 130호인 삼랑성(2944m)으로 둘러싸여 있다.

보물 제178호 대웅보전,  범종,  삼랑성, 유형문화재 양헌수장군 승전비,

향토유적 정족산 가궐지,선원보각지가 있다.

 

특히 조선왕조 실록을 보관했던 사고지가 있고,

팔만대장경 일부인 묘법연화경, 고려 충렬왕비 정화공주가 부처님전에 불을 밝힌 옥등 1점,

청동수기 1점, 약수 등이 있으며

전설이 있는 나녀상, 열매가 열리지 않는 은행나무, 울나무 등 고령이 된 나무들이 많다

 

 

 

 

 

 

 

전등사 동문.

 

 

 

▲ 정족산성 (삼랑성)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는 정족산성(=삼랑성) 입니다.

2,300m 길이로 전등사를 감싸듯 둘러 쌓여있는 축조된 성입니다.

조선 고종 3년 병인양요시 양헌수장군이 이 성을 침입하는 프랑스군을 무찌른 전승지 이기도 하답니다

 

 

 

삼랑성 동문으로 들어가면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을 이곳으로 유인해

물리쳤던 것을 기념하는 승전비가 있다

 

 은행나무

씨앗을 퍼트지 못하는 전등사 은행나무는 은행이 열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윤장대

윤장대란 불교경전을 넣은 책장에 축을 달아 돌릴 수 있게 만든 것으로

윤장대를 돌리면 경전을 읽은 것과 같은 공덕이 있다고

 

 

 

 

 

 

 

 

전등사 경내 입구 누각식 건물

고려 말 대학자 목은 이색의 <전등사시>에서 대조루를 읊은 시구가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 말에 대조루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

1932년 사찰안의 건물을 수리하면서 대조루도 다시 지었다고 한다.

 

 

조금 더 오르면 절의 입구로, 서해 바다의 드나듦을 볼 수 있는 곳이라

 하여 이름 붙은 대조루가 나오며 그 아래를 지나 오르면 나녀상이 있는 대웅전이다 

 

전등사대웅보전(보물 제178호)

 

조선 광해군 13년(1621)에 다시 지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목조건물,

네모서리 기둥 윗 부분에는 벌거벗은 '나녀상'을 조각

.전설에 의하면 목수의 사랑을 배반하고 도망친 여인을 조각하여 추녀를 받치게 하였다고 한다.

 

추녀를 받치고 있는 나녀상.

 

 

 

 

설법전

 

 

 

 

 

 

 

 

 

 

 

 

 

전등사 종각

 

중국 송나라 때(1097) 회주 숭명사에서 무쇠로 만든 종

.2차대전 당시 일본군이 병기를 만들려고 부평 병기창에 갖다놓은 것을 광복 후에 옮겨놓았다.

종의 정상부에는 두마리 용으로 이루어진 종고리가 있다.

몸통 위부분에는 8괘가 있으며, 그 밑으로 종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각각 8개의 정사각형을 돌렸다.

정사각형 안에는 명문을 새겼는데, 중국 하남성 백암산 숭명사의 종이라는 것과

북송 철종 4년(1097)에 주조되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범종 & 법고

범종은 땅 가까이에 매달려 있어서 종소리가 땅 속 깊은 지옥까지 울려 퍼지도록 해서

지옥의 중생들을 꺠우치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법고는 법을 전하는 북으로 땅 위의 중생을 깨우치는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정족산사고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장소입니다 

 

 

부도전

 

 

 

 

 

죽림다원

 

 

 

 

 

 

 

한국 천주교 최초의 순교 성지 전동 성당

 

전주 전동성당은

백년전통을 간직한 순교 일번지로서 로마네스크 건축양식으로

동양 최고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성당

1791년 신해박해대 윤지충(바오로) 권상연(야고보)이 서슬퍼른 칼아래 참수형을 당한

한국 최초의 순교터에 세워진 성당으로 1981년 국가지정 사적299호입니다

 

그후 백년뒤 1891년 프랑스신부 "보두네"가 대지를 구입

1908년 푸아넬신부의 설계로착공 7년만인 1914년에

많은 우여곡절 끝에 외형공사를 마쳤고.모든시설을 완비하고

축성식을 가진것은 1931년으로 완공까지23년이 걸린 대역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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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동성당은  호남지역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다

로마네스크 양식 건물이며, 중앙의 종탑과 양쪽 계단에는 비잔틴 양식의 뾰족 돔을 올렸으며

성단내부에도 비잔틴 양식이 녹아 있다

한국의 교회 건축물 중 곡선미가 가장 아름답고 웅장하여 화려한 건물로 손꼽히고 있다

 

 

전동성당은

 풍남문 밖에서 이슬처럼 사라져간  순교자의 피와 영혼이 그대로 묻어있는 성벽의 주춧돌을 옮겨와

성당의 주춧돌을 삼음으로서 순교자의넋을 간직한 성당으로

천주교의 아품과 역사를 고스란히간직하고있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아름답고 웅장한 성당이다

천주교 사상 최초 순교자였던 윤지충의 순교지였던

풍남문 성문 밖 바로 이 터에 순교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성당이 지어졌다고 한다

 

서울 명동성당의 내부 공사를 마무리했던 프와넬 신부의 설계로 보두네 신부가

1908년에 착공하여 7년만인 1914년에 우여곡절 끝에 외형공사를 마쳤다

벽돌은 중국인 인부 100여명이 직접 구워서 썼고주춧돌은 풍남문밖 성벽의 돌을 가져다 썼다

 (전동성당 홈페이지 발췌)

 

 

 

 

 

 

 

성당 내부

 

 

순교자 권상연과 윤지충,유중철, 이순이 동정 부부를 채색화한 스테인드글라스

 

사제관

 사제관은 본당을 세운 뒤 2대 주임신부였던 라크루신부가 1926년에 건축하였다

사제관은 르네상스 양식을 바탕으로 로마네스크 양식을 가미한 절충식 건물로

전동성당의 동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북향하고 있다

1층 부분은 깬돌 허튼층쌓기를 하였고

2 ,3층 창대에는 화강석을 설치하였고 창틀외곽은 벽돌로 리아스식 쌓기를 하였다

(홈페이지 발췌)

 

 

성당의 뒷 모습

 

한국최초 순교터 표석: 정문우측

 

초대신부  보두네 (윤사물)신부  흉상

한국 최초 순교자 윤지충(바오로) .권상연(야교보)상 

 

 

피에타 상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상  (로마 베드로 대성당)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의 시신을 끌어안고 있는 성모상,

이탈리아어로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

 

 

 

 

 

전주 전동성당 서울 명동성당, 대구 계산동 성당 함께

대한민국 3대 성당으로 손꼽히는 곳으로

명동성당은

고딕양식 으로 수직 수직효과를 강조한 아버지의 모습이라면

 전동성당은

 비잔틴 풍의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고풍스럽고 곡선미가 아름다운 어머니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성당의 내부 장식물은 로마에서 직접가져왔다고 한다

밤의 정동 성당은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룬

 성당의 옆모습

 

성당 뒷편에 있는 ` 한국최초 순교자 기념관

 

 

 

 

 

 

전주시  교동 전주성심여교 교정에는 NON SIBI라고 새겨진 비문이 세워져 있고,

그 받침목에는 眞善美 라는 세글자가 세겨져 있다.

 

 

'Non Sibi'는 본래 라틴어로서

'나를 위하지 않는' '나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만을 위해서가 아닌' 이라는 말이다.

이는 생명을 바쳐 사람을 섬기려 오신 예수님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하느님을 닮은 聖心人을 육성하고자 하는 이 학교의 교훈이라고 한다.

 진선미(眞善美)에는 이 'Non Sibi 정신'이 베어 있습니다.

 

 

 

 

 

 영화 `약속`을 기억하는가

1998년 전도연과 박신양 주연으로 개봉한 영화<약속>은

조직보스인 '박신양'과 의사인'전도연'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담은 내용으로

영화속 결혼식 장면은 주인공 박신양이 경찰서로 자수하러 가기전 둘만의 결혼식을 올리던 장면으로

엔딩씬으로 사용되어 화제를 나은곳이랍니다

 

 

풍남문은 한국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과 권상연 그리고 호남의 사도 유항검과

 초대 전주 지방 교회의 지도급 인물들이 처형된 곳이다

 

경기전에서 바라보는 전동성당은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와 서양문화 융합의 상징이 되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천주교 순교자 124명의 시복을 위해 8월에 우리나라에 옵니다

시복이란

천주교회가 거룩한 삶을 살았거나 순교한사람을 복자(福者)로 선포하는것을 말한다

복자는 성인(聖人) 바로 전단계로 로마교황청에서 매우 엄격한 심사를 거쳐 시복을 결정합니다

이중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윤지충입니다 전동성당은  그가 순교한 자리에 세워졌어요

 우리나라는 김대건 신부를 비롯해서 103명이 1984년 에 성인( 聖人)으로 추대되었습니다

 

전주지역  한옥마을 답사

 

  답사코스 

* 한옥마을(오목대.태조로.경기전,어진박물관.학인당)

* 한국 최초 천주교 순교지 전동 성당

* 덕진연꽃공원( )

 

 

 

 

 

 

 

 

오목대(梧木臺)

고려말 이성계가 남원 운봉 황산에서 왜군을 무찌르고 돌아가든중  조상인 목조가 살았던

이곳에 들려 승전(勝戰)을 자축하던 곳으로  조선을 건국후 세웠다

오목대

 

 

 

 

 

 

 

 

 

 

 

 

 

오목대를 내려오면 한옥마을의 척추라는  태조로로 이어진다

 

 

 

 

 

 

김석조 지도교수님께서 한옥마을 지도를 회원들에게 일일히 직접 챙겨주시고....

 

꼬마야 !  최고의 피서.  엄청 시원하겠네....

 

 

 

 

 

 

 

 

학 인 당

전주대사슴놀이의 명맥을 잇기 위해 전주 만석꾼 백낙중선생이 백미8천석과

 연인원4천명을 동원 건립하고 판소리 공연장으로 만들었다

백범 김구선생이 묶었던곳으로 유명하다

부속건물인 행랑이 붙어 있는  솟을 대문 과 효부 열녀 정려각이 있으며.

홍살문이 갖추어진 전형적인 조선시대 사대부 가옥의 전통가옥이다

 

 

 

 

강암 서예관 에서

무더위에 지친 회원님들   시원한 냉방에서  땀도식히고 휴식 ....

 

 

 

 

점심은 거금  만오천원짜리 석(떡)갈비에 연밥으로 최고의 식사로 (전주최고의식당)

밖에는 대기손님 50m나 줄서있고....

 

 

 

식당 천정 상량모양이  오목대정자 설계와 비슷하네

 

전주 경기전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모신 곳이다.

태종은 1410년 전주· 경주· 평양에 태조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를 모시고 어용전이라 하였다.

그 후 태종 12년(1412)에 태조 진전이라

부르다가 세종 24년(1442)에 와서 전주는 경기전, 경주는 집경전,

평양은 영흥전으로 달리 이름을 지었다.

경기전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광해군 6년(1614년)에 다시 고쳐 지은 것이다.  

 

 

 

경기전 안내도..

정문에서 태조의 초상화를 모신 ③정전까지는 일직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정문을 들어서서 홍살문을 지나 외신문과 내신문 두 문을 지나면  정전이 있다.

정전 영역 왼쪽에 ④영역은 부속건물들이 있고, 오른쪽에는 ⑤전주사고와 ⑥예종대왕 태실이

있으며, 뒤에는 ⑦조경묘와 ⑧어진박물관이 있다.

 

정문에서부터 일직선상으로 홍살문 - 외신문 - 내신문 - 정전으로 이어진다.

 

 

 

경기전 정문.

 

 

 

경기전 정문 앞의 모습.

정문 앞쪽에 수문장처럼 서 있는 비석은 하마비(下馬碑)다.

 

 

경기전 하마비..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22호.

이 곳은 조선 태조의 어진을 모신 곳이니 지나가는 사람은 말에서 내리고 아무나 출입하지 말라는

뜻이 새겨져 있다. "至此皆下馬 雜人毋得入(지차개하마 잡인무득입)"

 

 

다가서서 본 외신문. "동입서출(東入西出)"이 원칙이다.

가운데 문은 신이 다니는 길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양쪽 협문으로 다녀야 된다

 

내삼문을 들어서서 본 정전(正殿).

안에는 태조 이성계의 어진이 있다.가운데 신도(神道)라는 팻말이 보인다. 

가운데 길은 태조 이성계의 혼령인 신이 다니는 길이라는 뜻이다.

 모든 사람들은 마당 양쪽길로 다녀야 된다. 마당의 가마솥이 눈길을 끈다.

경기전 정전(正殿)..보물 제1578호.

안에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어진이 있다. 왕릉의 "정(丁)"자각과 같은 구조다.

정전에 모셔진 태조 이성계 어진..국보 제317호

이 어진은 조선 태조 이성계를 그린 초상화다. 경주. 평양 등지에 모셨던 어진은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버리고, 전주 경기전 어진만이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이라고 한다

 

 

마당 양쪽에 놓여있는 이 가마솥은 물독이다.

옛날에 물독을 "드므"라고 불렀다.

경기전은 화재에 취약한 목조건물이므로 일종의 방화수로 두는 것인데

화마가 밤에 몰래 왔다가 물드므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고 도망가라는 뜻이다

예종대왕 태실..전라북도 민속자료 제26호

옛날에는 왕손으로 태어나면 그 태도 이런 대접을 받았다

 

 

 

 

 

어진박물관

 

 

어진박물관에 봉안되어 있는 태조의 어진. 이 어진은 모사본이다.

일월오봉도(日月五峰圖

해와 달은 음양을 상징하며, 다섯봉우리는 오행을 상징하며,

이런 음양오행들은 곧 우주를 의미하고 이런 우주의 생성과 변화 음양오행을 대변하는 상징물들을

주관하는 그림의 주인공인 국왕은

 곧 우주의 주재자 또는 우주의 주재를 대신하는 존재와 같은 의미를 부여받을수 있었다.

 

 

어진박물관

어진박물관에 봉안되어 있는 태조의 어진. 이 어진은 모사본이다.

 

 

어진박물관에는 역대 임금의 어진도 볼 수 있다.

 

 

사고(史庫)는 왕조실록을 봉관한 곳이다

지금 이 전주사고에는 실록은 보관되어 있지 않고, 실록에 관한 여러가지 기록이 전시되어 있다.

 

 

 

 

 

 

 

조경묘 앞에도 홍살문이 있고 홍살문 왼쪽에 하마비가 서 있다.

태조 이성계의 시조를 모신 곳인데 누가 감히 이 앞에서 말을 타고 거드름을 피울 것인가~!!!

그러나 조경묘는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일반인 출입금지다

 

 

 

 

100년이 넘은 매실나무

 

 

 

아름다운 대나무숲 드라마 " 궁 "의 촬영지

 

 

경기전 서쪽(왼쪽)에 있는 부속건물들

제기고..

제사 때 사용하는 그릇이나 기구를 보관하는 장소다

 

 

 

어정(御井)..임금의 음식을 만들거나 임금이 마실 물을 기르는 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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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경사(寶鏡寺)

 

보경사는 불국사의 말사(末寺)로  신라 진평왕25년(AD603년) 지명법사에 의거 창건

지명스님의 팔면보경을 묻고 그 위에 금당을 세워 절을이룩한뒤 

보배거울(鏡)을 묻었다하여 보경사(寶鏡寺)라한다

 

 

 

설화에  등장하는 두거울은  불가에서 거울을 진리에 비유하고 

팔면경과 십이면경은 불교교리의 획심을 이루는

팔정도(八正道)와 십이연기(十二緣起)를 각각 은유한것이 아닌가한다

 

 

현존 당우로는 대웅전 · 대적광전 · 영산전 · 팔상전 · 명부전 · 산신각 · 천왕문 ·등이 있으며,

 중요문화재로는 원진국사비(圓眞國師碑보물 제252)와 보경사부도(보물 제430), 11기의 부도 등이 있다...

 

 

 

 

 

 

 

 

 

 

 

 

 

 

첫관문인 천왕문 은 신방묵에 조각된 사자상 문양이 특이하다

 

적광전

 

 층석탑

 

 

오층석탑에서 중요한 부분은

1층 몸돌앞뒤에 새겨진 연봉 자물쇠하나 와 동그란 문고리 두개가 드르라지게 새겻다

 

 

 

 

 

 

원진국사비

 

 

 

원진국사부도

 

 

 

 대웅전

 

 

 

웅전 뒤편으로는 조선 숙종3(1678)에 건립한 명부전,

석가세존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모신 영산전,

  1678년 학열 스님이 화주하여 세운 원진각,

1914년에 이전한 산령각, 1678년 지총 스님이 화주하여 세운 팔상전과 미술관이 자리하고 있다...

 

 

 

 

 

 

 

 

 

 

 

 

 

 

 

 

 

 

 

 

 

 

 

 

 

 

 

 

 

옥산서원(玉山書院)

 

동방오현(五賢)의 한사람 으로 추앙받는 희재 이언적(李諺迪)을 배향하는 서원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는 회재 이언적선생의 고향이자

옥산서원은 회재 이언적(1491~1553)을 배향하는 서원으로 그의 사후인 선조 5년인 1572년에

경주부윤의 이제민이 지방 유림들과 함께 세웠다.

옥산서원 입구에서 150m의 진입로는 자계천을 따라 늘어선 나무들이 숲길을 이루어 햇볕 한 점 들어올 틈이 없다.

시냇물 소리가 은은하게 울려퍼지는 이곳 옥산서원은 그야말로 낙원이 따로 없을 것 같은 곳이다

 

 정문에는 ‘역락문(亦樂門)“의 현판이 걸려 있다.

이는 논어의 학이편에서 '유붕이자원방래 불역락호아(有朋而自遠方來 不亦樂乎)'에서 따왔다한다.

그 뜻은 서원을 찾는 손님에게 더 없이 정답고 편안하다는 의미로 당대의 명필가 한석봉의 필체라 한다.

 또한 유생들의 휴식장소인 무변루와 강당인 구인당의 필체도 한석봉의 글씨이다.

 

 

구인당의 맞은 편에 흰바탕에 검은 글씨인 옥산서원의 현판 글씨 또한 추사 김정희의 필체이다.

 

한석봉의  필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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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산서원을 나와 회재 이언적선생의 사랑방이었던 독락당을 가기위해서는

도덕산과 봉좌산 그리고 어래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이 모여드는 자계천을 건너야 한다.

암반을 타고 흐르는 자계천에는 작은 폭포를 이루고 ‘ㄷ’ 모양의 소는

금방 용이라도 튀어 나올 것 같은 스산한 느낌이다.

회재이언적은 이곳에서 매일 얼굴만 세수 한 것이 아니고 마음도 딱 고 씻었다 한다

 

지금도 암반에 ‘세심정’이란 글귀가 뚜렷하다

 

 

 

 

독락당(獨樂堂)

 

희재는 장년시절주앙정계에서 밀려나 자옥산 골짜기에 7년간을 은거하였다

그가 살든집의 사랑채가 독락당이다

 회재선생의 거처인 독락당의 입구

 

 

 

 

 왼쪽은 사랑채쪽의 담장, 오른쪽은 숨방채(행랑채와 비슷)쪽의 담장이다.

담장 끝에는 계곡이 나타난다.

 

 

 

 정혜사지13층석탑 (국보 40호)

 

 

 

 

독락당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정혜사지가 있는데 지금은 아무 것도 없고, 탑만 남았다.

조선시대 각종 문헌에 아름다운 절이라고 칭송한 시도 있다는데...

지금은 정혜사지 13층 석탑만 남았다.

 

국보 40호 정혜사지13층 석탑

이런 형식의 탑은 전무후무하며, 다소 현대적인 미적감각도 가진 탑이다.

아무리 보아도 심심하지 않은 석탑이라 쉽사리 발길을 돌리는 게 쉽지 않은 석탑이다.

 

 

특이한 점은 저렇게 멋진 탑을 만들고 기단은 그냥 흙으로 돋았고, 그 아래 막돌쌓기하였다는 점인데...

토축, 막돌쌓기로 엉성한 듯한 기단부와 파격적인 미를 자랑하는 탑이 약간은 부조화스럽다

사일회 창녕지역답사

 

연지 (영산읍)

 

 

 

 

 

 

 

 

 

 

 

 

 

 

 

 

 

 

 

 

 

 

영산지구 전적비

 

 

 

 

 

 

영산 만년교

 

 

 

 

관룡사 석장승

 

 

관룡사 산문(일주문)

 

 

 

 

 

 

하왕산 관룡사

 

 

 

대웅전

약사전

 

 

 

용선대 석조여래상

 

 

 

 

 

 반야 용선 바위

 

 

술정리 동.서 석탑

 하병수 가옥

 

 

신라진흥왕 척경비

 

 

 

 

 

 

 

척 화 비 (斥 和 碑)

 

 

교동. 송현동 고분

 

 

 

 

안상영회장  회사견학및 방문기념

 

 

충무공 얼 서린 한려수도의 꽃, '한산도

 

 

 

 

 

 

 

 

閑山島(한산도)  선착장

 

 경남 통영시 한산면에 있는 섬으로 총면적 14.785k㎡ 이다.
“통영항여객터미널”에서 한산도 제승당까지는  뉴파라다이스호 여객선으로 30분 소요되는데

 

오전 7시부터  오후 6시까지  하루 12회 30분간간격으로 운행되는데

 

한산섬에서는 매시 30분에 출발한다.. 

 

 

 

 

 

 

 

 

 

 우물의 안내판에는 이렇게 적어 두었다.
“1593년 당시 충무공 이순신장군께서 한산도 통제영(統制營) 내 제승당(制勝堂)을 창건하고,

 

1,340일 동안 머물면서 군사들과 함께 사용했던 우물로서 바다에 가깝지만 짠맛이 전혀 없는 것이 특징이다

 

 

大捷門(대첩문) 편액: 박정희대통령書

 

제승당 입구의 일주문 현판에는 대첩문(大捷門)이라 적혀 있고,

 

좌.우에는 두릅나무과 아열대성 식물인 팔손이나무(八角金盤)가 있다.

 

이 나무는 비진도에 자생하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와 심어 두었는데, 늘 푸른 활엽관목으로 잎이 8갈래라

 

‘팔손이나무’라 부르며 천연기념물 제63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충무문의 계단을 오르면 정면에 제승당이 자리하고 우측에는 ‘후손통제사행적비’

  2채의 비각이 있고

그 끝에는 수루(戍樓)가 있다.

 

수루는 일종의 망루로서 충무공이 왜적의 동태를 살피던 곳으로

 

왜적을 물리치고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우국충정의 시를 읊기도 한 곳이다.

 

오른쪽의 고동산, 왼쪽의 미륵산 뒤쪽의 망산을 연결, 봉화 공동, 연등을

 

이용하여 적의 동태를 파악했던 곳이다.

 

특히 수루 안에는 싯구가 있어 그 정취를 느껴볼 수 있다.

 

수루에 올라 밖을 보니 ‘한산대첩 기념비’와 인근의 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수로와 마주보는 곳에 충무공의 영정을 모시고 향사를 올리는 충무사(忠武祠)가 있는데

 

입구에는 홍살문이 있고 우측에는 한글비가 있어 이채롭다.

 

충무사를 둘러쌓고 아름다운 노송이 서있어 솔향기가 매일 향을 피우는 듯하며,

 

솟을삼문을 들어가면 좌측에 1739년 제 107대 통제사 조경(趙儆)이

 

제승당을 다시세운 것을 기념하는 ‘제승당유허비’가 서있다.

 

 

후손통제사비각

 

 

 

 

 

 충무공의 ‘진중시가’

 

 

 

수루의 난간에서  왼쪽에 보이는 ‘한산대첩기념비’,   바다가운데 보이는 섬 ‘해갑도’

 

 

 制勝堂(제승당) 

 

사적 제113호     경남 통영시 한산면 두억리 875 
制勝堂(제승당)은 임진왜란 때 조선 수군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의 사령부가 있던 곳이다. 

 

제승당일원 현재의 모습은 충무공을 숭상하던 박정희 대통령이 1976년 성역화작업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제 140대(1786년)김영수라는 통제사가 71세 때 쓴 것이라 한다.

 

 

 

 

제승당 기둥주련 충무공의 한산도의 밤이라는 詩. 

 


                       水國秋光暮(수국추광모): 넓은 바다에 가을햇빛 저무는데
                       驚寒雁陳高(경한안진고); 찬바람에 놀란 기러기떼 하늘 높이 날아가네
                       憂心輾轉夜(우심전전야); 근심스런 마음에 잠 못 드는 밤
                       殘月照弓刀(잔월조궁도): 새벽달은 무심코 칼과 활을 비추네.

 

 

홍살문

 

아래를 지나면서 몸과 마음을 경건히하고 통과하는 마음의 준비문 

 

 원래 릉이나 묘 앞에 세웠던 것이나 정2품 이상을 지낸 관리에게 내렸다는데,  

 

충신이나 효부 열녀 효자에게 나라 인증샷인  이런 홍살문을 내려 주면

 

세금까지 면제 받고 가문의 영광이었죠

 

 

 

忠武祠 內三門.   오른쪽문으로 들어가십시요

 

 

홍살문 안에 있는 충무사는 통영지방 유림들이 충무공의 뜻을 기리기 위해 1932년에 세운 사당이다.

 

처음에 충무영당이라 했다가 1976년 규모를 크게 늘리면서 충무사란 현판을 걸었다.

 

 

忠武祠(충무사)  박정희대통령글씨

 

 

 1932년 충무공을 사모한다는 뜻으로 한산도 섬마을 주민들이 모은 '모충계(慕忠契)'에서

 

충무영당이라는 사당을 세웠으나

 

1976년 박대통령께서 忠武靈堂의 堂이 격이 낮다 하여

 

직접 친필로 충무사(忠武祠)라는 현판을 써서 내려 보냈다.

 

 

1975년(39년전)당시 진해있던  육군대학생들의 참배모습(충무영당)

 

 

충무공 影禎(영정)

 

충무사에 모셔진 영정은 종이품 통제사의 관복 차림이고 1978년에 사적을 정화할 때 정형모 화백이 그린 것이다.

 

매년 봄.가을에는 제사를 지내며 한산대첩 기념일인 8월 14일에는

 

해군작전 사령관과 해군사관생도들이 참배를 하고,

 

통영시는 한산대첩제를 성대히 거행하여 충무공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제승당유허비각

 

 

한글비-

1948년 광복기념으로 초.중.고등학생들의 성금을

모아 건립한 이순신장군의 해전승전에 대한 기록 비문

 

 

閑山亭(한산정)과  과녁판
 충무공이 부하들과 바다 건너 쪽에 과녁을 세워 두고 활쏘기 시합이나

 연습을 하였다는 곳이다.
 명중이 되면 붉은 깃발을 올려 들어 줬으며 빗나갔을 때는 징을 한 번 울렸다 한다. 
 

 과녁까지의 거리는 145m에 이르며 바다를 사이에 두고 연습함으로

 

 밀물과 썰물의 교차를 이용하여 수련하므로 거리감을 익혀 실전에 매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1594년 4월에는 이 곳에서 임시 무과를 시행하여 100여명의 장교( 무과 관리)를

선발하기도 했다고 한다.

 

 

한산정으로 내려가면 활을 쏘는 사대인 한산정에 서서 바다건너에 있는 과녁을 맞히게

설계되어 있어  충무공의 그 호쾌함이 느껴진다.

 

 

 

 

 

 

 

解鉀島(해갑도)

 

 충무공이 전쟁을 끝내고 거기에 올라가서 갑옷을 벗고 땀을 식혔다 해서 해갑도라고도하며
                       민속학적으로 蟹甲島(해갑도=게의 등 껍질처럼 생겼다 해서)라고도 한다.

 

 

한산만 석조 거북선 등대 

 

 

 한산만 거북등대

 

      제승당 앞 바다의 이 거북등대는 1963년 지역 시민들이 성금을 모아서 세운 것으로

 

      한산대첩 해전지 바다에 거북선형태의 조각을 만들어 암초위에다 세운 것이다.

 

거북선 거북의 머리는 일본을 향하고있다

 

        또한 이곳을 지나는 선박들의 등대로 역할을 하고 있다.

 

 

 

 

 

 

 

 

 

 

40년전 (1975년) 장교들이 이런배를 타고 한산도로...

 

  

 

달아공원에서

 

 

 

 

 

 

 

 

 

 

 

 

 

달아공원 일몰

 

 

펴 옴

 

 

 

 

 

 

 

 

 

 세계 4대 해전(참고)

 

1)B.C. 480년 그리스의 데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제독의 살라미스(Salamis)해전,

2) 1588년 영국 하워드(Howard) 제독의 칼레(Calais) 해전,

3) 1592년 거북선을 앞세워 승리를 거둔 이순신(李舜臣) 제독의 한산대첩(閑山大捷),

4) 1805년 영국 넬슨(Nelson) 제독의 트라팔가(Trapalgar) 해전

 

한산대첩

 1592년 임진년 7월 8일. 한산도앞 바다에 드넓은 날개가 펼쳐졌다.

거대한 학의 날개, 조선 수군의 학익진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조선 수군의 완벽한 승리, 적선 73척 중 59척을 격침시키고

 9천여명의 왜군을 수장시킨 한산대첩이었다.

 

살라미스해전(영화: 제국의부활)현재 극장에서 상영중

인류역 사상 최초이자 가장치열한 대규모해전으로  제3차페르시아전쟁중인

 BC480년 9월23일그리스연합군을 이끈 아테네장군 테미스토클레스 가

페르시아군을 폭이좁은 살라미스해협으로 유인 하여 11시간 대적끝에 격파했다.

칼레해전 . 트라팔카헤전.한산도대첩과 더불어 세계4대해전으로불린다

도솔암(兜率庵)

 

도솔암은 기도발로 유명한 곳으로

우리나라 3대 지장(地藏) 기도처중의 하나다.

지장 기도처는 죽은 조상들의 영가천도(靈駕遷度)에 주특기가 있는 도량을 일컫는다.  

 지장보살은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한 양반이라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영혼들을 구제하는 보살이다.

 

- 자료 : 이하 지도교수 답사 안내문 중 -

 

  도솔암 전경

 

 

 

 

극락보전
관음전은 정면3칸, 측면3칸의 다포계의 맞배지붕이고 풍판이 세워진 목조기와집이다.
내외부에는 단청이 칠해져 있지 않고 장엄이 없으며

수미단이나 닫집은 설치 되어 있지만단청칠이 되어 있지 않음에도

화려하고 웅장하다

 

 

 

 

 

 

 

 

도솔암 요사채

  

 

 

 

 

내원궁 일주문,

 

 

 

 

 

도솔암에서 나한전과 마애불 오르는 길

 

 

나한전
 나한, 즉 아라한을 모시는 곳이다.

아라한은 소승불교의 수행자 가운데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성자를 지칭한다.

조선시대에 도솔암 용문굴에 살던 이무기가 마을 주민들을 괴롭히자
이를 물리치기 위하여 인도에서 나한상을 들여와 안치하였더니

 이무기가 사라졌으며
이후 이무기가 다시는 나타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이 건물을 세웠다는 전설이 있다.

 

 

 

도솔천 내원궁은

 상도솔암이라 부른다 본래는 상하동서남북의 여섯 도솔암이 있었다 한다.

 

내부의 장엄한 법상 위에는 보물로 제280호로 지정된 고려시대의

두건형 금동지장보살상과
그 뒷면에 목각의 지장후불탱화를 봉안하고 있다.

 거대한 바위 위에 초석만을 세우고 만든이 건물은 작은 규모이지만

매우 안정된 느낌을 준다.

 

                                                     금동지장보살좌상(보물 제280호)  

 

 청동 불상에 도금한 불상으로 선운사 도솔암에 모셔져 있다.

머리에는 두건(頭巾)을 쓰고 있는데,

고려 후기의 지장보살 그림에서 보이는 양식이다.

일반적으로 지장보살은 다른 불상들과 달리 머리에 두건을 쓰고 있으며,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오른손은 가슴에 들어 엄지 손가락과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고 있으며,

왼손은 배에 들어 법륜을 쥐고 있다.

고려 후기의 불상양식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는 이 보살상은

우아하고 세련된 당대 최고의 걸작이다.

 

 

도솔암은 우리나라 3대 지장(地藏) 기도처중의 하나다.

지장 기도처는 죽은 조상들의 영가천도(靈駕遷度)에

 주특기가 있는 도량을 일컫는다.  

 

 

우리나라 3대 지장기도 처는  북한에 하나 있고,

강원도 철원의 삼원사, 그리고 선운사의 도솔암이다.

이 지장 기도처 중에서도 도솔암은 특히 묵은 영가를 떼는데 특효가 있다고 한다.

묵은 영가란 죽은 지 백년도 넘는 귀신들을 말한다.  

생전에 집착이 많은 사람이 죽으면 십중팔구 저승에 가지 못하고 귀신이 된다.

귀신이 되어 구천을 떠돌다가

후손의  앞길을 가로막거나 이유 없이 몸을 아프게 하는 작태를 보인다.  

이런 귀신들을 도솔암의 치료를 받으면 약효가 뛰어나다 한다.

 귀신을 저승으로 잘 보내는 치료가 천도재(遷度齋)이다. 

 천도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한 조건으로 천도재를 주관하는

스님의 도력이 중요하고,

천도재를 지내는 도량의 기운이 좋아야 하고, 마지막으로 후손의 정성이 중요하다

 

- 자료: 지도교수 답사 안내문 중 -

 

  

내원궁의 산신각

 

 

 

 

 

 

진흥굴

도솔암으로 가는 숲길 오른편에 진흥굴이라 불리는 천년 바위굴이 있다.
 신라 24대 진흥왕이 부처님의 계시를 받아 당시 백제땅인 이 곳에 의운국사를 시켜
선운사를 창건케하고, 왕위를 퇴위한 후 선운사를 찾아 수도했다는 암굴이다.

 

또한 진흥왕은 그의 중애공주와 도솔왕비의 영생을 위해

이 굴 윗 산에 중애암을 그리고 만월대 밑에 도솔암을 각각 세웠다고 한다.

 


 

 

동불암 마애불 

 

내원궁이 올라앉은 암반은 칠송대(七松臺)라 불린다.

높이 17m의 거대한 마애불로 한국의 3대 마애불

 (안동제비원 마애, 파주 용미리마애불)중의 하나다.

이들 모두가 미륵부처이다.

도솔암이 미륵상생의 천상세계를 상징한다면 이 미륵불은 하생의 지상낙원을 의미한다.

이 마애불은 미륵부처로 호남을 대표하고 선운사는 미륵신앙의 중심도량이다.

 

미륵도량은 민중의 애환을 56억 7천만년 후에 탄생할 위대한 지도자를

그리는 민중의 바램이 담겨 있다.

이 미륵불은 1,500년전 검단선사(黔丹禪師)의 진상(眞橡)이라고 한다. 선운사의 창건주다.

검단선사는 선운사 터에 살고 있는 도적들을 교화 시키고 바닷가 소금 굽는 법을

알려주어  생계수단을 삼도록 하였고,

민초들 사이에 지도자로 칭송을 받았고 절벽에 미륵의 모습으로 새겨지게 되었다.

「전설에 의하면」석불 배꼽에는 신기한 비결이 들어있어

그것이 세상에 나오는 날 한양이 망한다고 전해져 왔고

정씨 성을 가진자가 왕이 된다는 설,

또한 벼락살을 동봉해 놓았기 때문에 그 비결을 꺼내놓으려고 손을 대면

벼락살을 맞아 죽는다고 했다

- 자료: 지도교수 답사 안내문 중 -

 

 

 

 

 

 

 

내원궁의 맞은 편에는 선운산(도솔산) 천마봉이 마주보인다

 

 

 

 선운천 절벽에 붙어사는 송악(천연기념물367호),

  주로 서남해안이나 섬 지방의 숲속에서 자라는 상록성 덩굴식물이다

 

 

 

진흥굴 근처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반송이 있는데 장사송이라는

이름과는 별도로 진흥송이라고도 불린다

 


장사송

반송으로  수령은  약 600살 정도로 추정되고 높이는 23m로 

높이 3m 정도에서 줄기가 크게 세 가지로 갈라져 있고, 그 위에 다시 여러 갈래로

갈라져 부챗살처럼 퍼져 있다.
장사송은 이 지역의 옛 지명인 장사현에서 유래한 것이며
진흥송은 옛날 진흥왕이 수도했다는 진흥굴 앞에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선운사에서 /최영미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고창읍성

 

 

 

 

모양성이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진 성이다.

전국에서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자연석 성곽으로 단종1년(1453)에 세워졌다고도 하고

숙종 때 완성되었다고 한다

 

사적 145호로 지정된 이 성의 높이 4~6m이고 둘레는 1,680m 사용된 석재는 자연석이지만

초석, 대좌석, 당간지주 등 어느 절에서 나온 뜻한 석재도 있다.

 

 

. 

여자들이 이 성을 쌓았다는 전설이 있다.

고창읍성에는 여자들이 돌을 머리에 이고 성을 밟으면 무병장수하고

죽어서 극락에 간다는 전설과 독특한 성밟기 풍속이 전해 온다.

- 자료: 지도교수 답사 안내문 중 -

 

 

]

 

성을 한 바퀴돌면 다릿병이 낫고 두 바퀴돌면 무병장수하여

세 바퀴돌면 저승길이 환히 트여 극락에 갈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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