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경인아라뱃길

경인 아라뱃길은

천년 동안 이어져 온 우리 민족의 염원입니다.

13세기 고려 고종 때 당시 실권자였던 최충헌의 아들 최이가 최초로 시도된 이후

조선시대를 거치며 끊임없이 인천 앞바다와 한강을 직접 연결하기 위해

우리 역사상 최초의 운하를 건설을 시도했지만,

원통현 400m구간에서 암석층을 뚫지 못해 결국 운하건설은 실패했다고 한다.'

그러나 800년이지나 마침내 경인 아라뱃길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합니다.

 

굴포천 방수로사업과 연계하여 최첨단 공법의 갑문과 주운수로,

항만과 교량, 친수문화공간을 함께 건설함으로써 홍수조절 기능은 물론

물류혁신과 관광, 레저 기능을 겸비한

대한민국 최초의 친환경 내륙 뱃길이 탄생합니다.

 

경인아라뱃길은 인천터미널부터 김포터미널까지 길이 18km로 정부가 항만 물동량 확대와

관광객 유치를 위해 2009년부터 2조2500억원을 들여 건설한 대규모 운하로서

한강 유역인 서울 강서구 개화동과 서해가 인접한 인천 서구 오류동을 잇는

국내 최초의 내륙형 뱃길이다

운하 길이는 총 18㎞로 폭은 80m, 수심은 6.3m에 달한다

 

 

 

 

 

경인아라뱃길은 물길을 따라 자전거와 인라인 스케이트 도로도 조성해 한강 자전거도로와

연결하여많은 사람들이 찾을 수 있는 나들이 코스로 개통효과가 기대되고 있습니다.

 

또한 김포와 인천 터미널에서 부산, 포항뿐 아니라 중국 칭다오, 베트남, 러시아 등의

해외 10개 도시를 왕복하는 선박 18척도 운항을 시작합니다

불세출의 가수 배호 흉상

멀리 인천대교가보이고..

 

이팔등신 미인은 누군고..

3층선상 갑판위에서는 맥주 소주 파티가..

유람선 지하층 공연장 무대에서는 볼거리쇼가 한창이고..

드디어 쇼가끝나고. 춤판이벌어지는데..

 

할머니까지도 신바람이나고

깁숙희 아드님 해군이대위도 마중나오고

 

모처럼만난 모자간에 할이야기도 많고...

 

귀가길 버스안에서도 신나게 한판 ...

 

 

경인아라뱃길은 총36km로 자전거와 인라인스케이트는 물론 유람선을 타고도

서해로 나갈 수 있는있고 시천나루터, 아라폭포, 두리생태공원 등의 수향 8경을 즐길 수 있다

 

 

 

답사코스: 창선대교- 남해이동면초음리 장평지-주암저수지-서재필선생공원

-보성대원사 티벹박물관(아름다운길100선왕벗꽃길)

 

 

 

 

 

 

 

 

 

 

 

 

 

아픈역사의 숨결   광성보 (廣城堡)

 

 

강화 5진 7보 53돈대와 더불어 강화해협을 지키는 중요한 요새다. 

     고려가 몽고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강화로 도읍을 옮기면서 37년간 성을 쌓았는데,

 

효종 9년(1658)에 대대급 규모인 광성보가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숙종 때  용두돈대, 오두돈대, 화도돈대, 광성돈대 등 소속 돈대가 만들어 고 

     영조 21년(1745)에는 성을 고쳐 쌓으면서 성문을 만들고 누각을 세워 안해루라 하였다.

 

신미양요 때(1871년) 미국군대와 사투를 벌인 격전의 현장으로서

이 때 전사한 어재연 장군을 기리는 전적비와 350여명의 순국영령들을 기리기 위한 '신미순의총' 이 있다.

 

안해루(1745년 설치)는 바다를 지킨다는 뜻이 담긴 진지 관문이다.

 

 

 

 

 

 

 

쌍충비

 1871년 신미양요 때 광성보 전투에서 순절한 중군 어재연(1823-1871)외 59명의 순절비이다

 

신미양요 순국 무명용사비

신미순의총.

 

 신미양요 때 광성보 일대에서 미해군과 격전하다가 전사한 용사들의 묘가 있는 곳이다

당시 중군 어재윤 장군과 아우 재순 형제는 고향인 충북 음성군 대소면 성본리에 안장하고.

남은 군졸 51인은 신원을 분별할 수 없어 7기의 분묘에 합장하여 그 순절을 기리고 있다

 

 

 

 

광성돈대 (廣城墩臺)

 광성보에 소속된 3개 돈대중 하나로서

숙종5년(1679년) 승군 8,000명과 어영군 4,300명이 40일만에 완공하였다 한다.

신미양요 최대의 격전지이자 신미양요 때 파괴되었다 복구된 곳으로

사정거리 700m의 화포가 있다지만, 이 포는 날아는 가지만 터지지는 않아 위력이 약하다고 한다.

이런 대포로 미해군 함포와  상대를 했으니,  .. 이미 승부가 난 전쟁이었을 것이다.

이곳은 1871년의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한 격전지였으며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열세한 무기로 용감히 싸우다가 몇 명을 제외하고는 전원이 순국하였다.

 

 

 

 

광성돈대...오른쪽 부터 '대포 / 소포 / 불랑기

 

 

 

 

손돌목  돈대(孫乭睦 墩垈)

 손돌돈대는 광성보내에서도 사진찍기 좋은 곳으로 유명하다.

저 아름다운 곡선미를 어디다가 비교해 볼까......

 

 

 

 

광성포대

손돌목돈대 주변 3곳에 설치된 포대로 1875년 운양호사건 때 파괴된 것을 2004년 복원된 곳이라고 한다.

 

 

 

 

용두돈대(龍頭墩臺)

 

5진 7보 53돈대 가장 아름답다는 용두돈대

 원명은 사두돈, 뱀의 머리와 같다라고 하여 지어진 이름인데

고 박정희 대통령이 뱀의 머리 보다는 용의 머리가 낫다고 하여 바뀌었다고 한다

    성곽의 아름다운 모습이 파도처럼 넘실대는 길을 따라 용두돈대의 끄트머리

 손돌목이 있는 곳으로 걸어간다

 

 

 

 

대표적인 해수관음성지 보문사(普門寺)

강화도 서쪽의 석모도라는 섬에 있는데,

양양 낙산사와 금산 보리암과 함께

우리 나라 3대 해상 관음  기도도량으로 널리 알려진 사찰입니다.

신라 선덕여왕 때 지어진 사찰로 역사만 놓고 보면 천년을 이어오고 있는 절입니다

 

낙가산 보문사 일주문

 

 

 

 

 

 

보문사는 635년(선덕여왕 4년)에 창건했다고 하며,

전설로는 이 마을에 살던 어부가 그물을 쳤는데 물고기는 잡히지 않고 바위와 돌 22개를 올렸는데

꿈에 스님이 나타나서 일러준대로 현재의 석실에 봉안했더니

석가모니부처님과 관세음보살등 불상4기와 18나한상이 되었다고 합니다.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인 조계사의 말사로서

소원을 비는 많은 불교 신자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국 33관음성지중 제1호 보문사라는 표지

33관음 사리탑의 뒷편을 둘러 감싸안듯 오백나한이 모셔져 있습니다

.

 

 

 

 

 

와불전 과오백나한 

 

와불전은 천안대 뒤에 조성된 전각이다.

 천안대는 길 40m, 폭 5m의 큰 바위로 법회 때설법하는 장소로 사용되었고,

 그 크기가넓어서 천명이 않을 수 있다고 하여"천인대"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와불전은 열반 당시 모습의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셨습니다.
전체 신장이 10m이고, 열반대는 13m로 그 규모가 상당하다 하겠습니다

 

 

 

 

 

보문사의 중심에 극락보전이란 법당이 있습니다.

 석가모니불을 모신 대웅전과 달리 중심에 아미타부처님을 모신 법당을

극락전 또는 극락보전이라고 부른답니다.

 

 

 

 

 

 

 

 

 

 

 

 

보문사 석굴석굴사원의 예는 경주 석굴암, 경북 군위의 삼존석굴, 강원도 속초의 개조암 정도로우리나라에는 몇 되지 않는 귀중한 예입니다.일화에 따르면 창건 후 14년 뒤인 649년 신라 선덕왕 때 어부들                       그물에 걸려 올라온 석불상들을 이곳 동굴에 안치하였다고 하였으므로  곧 그때부터 석실이 조성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석실앞에는 오래된 향나무가 있는데

 6.25동란때 거의 죽었다가 3년뒤에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관음보살의 성지로 유명해서

예전에는 아주 큰 규모를 자랑하는 법당이라 수도 정진하는 스님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한 300명 정도의 스님들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때 이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때 사용했던 맷돌이라고 하네요

 

 

 

이 석굴에서 기도하면 효험이 뛰어나다고 알려지면서

마애불과 함께 불자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천연동굴을 확장해 만든 석실의 입구에는 세 개의 홍예문이 있다.

 이 문을 통과하면 기도를 올리는 불자들 앞으로 작은 나한상들이 모셔진 불단이 보인다.

 

 

 

 

 

   멀리 마애불상이 모셔진 눈섭바위가 보인다.

 

눈썹바위와 마애불

 

낙가산 중턱에  앉아 있는 이 불상은 눈썹 모양의 화강암 바위 아래 새겨진 관음상이다.  

 

한가지 소원은 이루어준다는 낙가산 관세음마애불상 가는 길. 계단의 갯수가 419계단

 

 보문사 마애불은

보문사가 관음 도량의 성지임을 상징하는 성보 문화재 로서

 마애 관음 좌상이 낙가산 중턱의 눈썹 바위의아래 새겨져있다

높이 920cm.너비 330cm달하는 거상이다

또 부처님 얼굴에 빠짐없이 있기 마련인 백호도 이마  사이에 솟아있다

 가슴에는 만자가 새겨져있다

 

이곳에서 정성으로 기도드리면 이루어 지지 않는 소원이 없다하여 

 지금도 신도들의 발걸음이 끊어지지 않고있다

 

 

 

 

용왕단
서해 바다의 탁트인 시야가 한눈에 들어오는 용왕단에서는각자의 소중한 발원을 담아 소원지를 써서 유리병 속에 100일간 보관을 합니다.
100일이 지난 후 용왕단에 보관된 소원지를 꺼내 스님들께서 축원을 하고 소전을 하게 됩니다.
  이곳은 전망이 좋아 사진도 찍고 잠시 쉬면서 숨을 고르는 장소입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서해의 낙조가 일품이라고.... 

 

 석모도

강화도 외포리에서 1.5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지만,

 외포리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한다.

 

 

 

 

 차량을 함께 수송할 수 있어 차를 타고 들어갈 수도 있다.

 

 

 

 

 

 

 

 

 

 

 

 

 

 

강화도 순무김치는  임금님께 진상했다고 합니다

역사의 숨결이 살아있는 강화도 역사탐방 

 

일시  :     2014년 .10월23 - 24일(1박2일)

인원   :    40명

탐방코스  : 전등사. 보문사(석모도).역사박물관..고인돌.고려궁지.용흥궁.

                평화전망대. 광성보. 마니산첨성단

강화도는

섬 자체가 우리나라 역사의 축소판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선사 시대의 고인돌 유적부터 단군왕검의 얼이 담긴 마니산, 고려 때의 대몽항쟁과 팔만대장경 조성, 

서양 세력과 처음으로 전투를 벌였던 ‘병인양요'에이르기까지 강화도의 역사는 

곧 한민족의 역사나 마찬가지였다.

강화도에는 전등사, 보문사 를 비롯해 유서 깊은 사찰도 많이 터 잡고 있다.

 

 

전등사(傳燈寺)

 

전등사는 고구려 소수림왕 11년 약 1600년전 아도화상께서 최초로 창건한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고찰로서 사적 130호인 삼랑성(2944m)으로 둘러싸여 있다.

보물 제178호 대웅보전,  범종,  삼랑성, 유형문화재 양헌수장군 승전비,

향토유적 정족산 가궐지,선원보각지가 있다.

 

특히 조선왕조 실록을 보관했던 사고지가 있고,

팔만대장경 일부인 묘법연화경, 고려 충렬왕비 정화공주가 부처님전에 불을 밝힌 옥등 1점,

청동수기 1점, 약수 등이 있으며

전설이 있는 나녀상, 열매가 열리지 않는 은행나무, 울나무 등 고령이 된 나무들이 많다

 

 

 

 

 

 

 

전등사 동문.

 

 

 

▲ 정족산성 (삼랑성)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는 정족산성(=삼랑성) 입니다.

2,300m 길이로 전등사를 감싸듯 둘러 쌓여있는 축조된 성입니다.

조선 고종 3년 병인양요시 양헌수장군이 이 성을 침입하는 프랑스군을 무찌른 전승지 이기도 하답니다

 

 

 

삼랑성 동문으로 들어가면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을 이곳으로 유인해

물리쳤던 것을 기념하는 승전비가 있다

 

 은행나무

씨앗을 퍼트지 못하는 전등사 은행나무는 은행이 열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윤장대

윤장대란 불교경전을 넣은 책장에 축을 달아 돌릴 수 있게 만든 것으로

윤장대를 돌리면 경전을 읽은 것과 같은 공덕이 있다고

 

 

 

 

 

 

 

 

전등사 경내 입구 누각식 건물

고려 말 대학자 목은 이색의 <전등사시>에서 대조루를 읊은 시구가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 말에 대조루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

1932년 사찰안의 건물을 수리하면서 대조루도 다시 지었다고 한다.

 

 

조금 더 오르면 절의 입구로, 서해 바다의 드나듦을 볼 수 있는 곳이라

 하여 이름 붙은 대조루가 나오며 그 아래를 지나 오르면 나녀상이 있는 대웅전이다 

 

전등사대웅보전(보물 제178호)

 

조선 광해군 13년(1621)에 다시 지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목조건물,

네모서리 기둥 윗 부분에는 벌거벗은 '나녀상'을 조각

.전설에 의하면 목수의 사랑을 배반하고 도망친 여인을 조각하여 추녀를 받치게 하였다고 한다.

 

추녀를 받치고 있는 나녀상.

 

 

 

 

설법전

 

 

 

 

 

 

 

 

 

 

 

 

 

전등사 종각

 

중국 송나라 때(1097) 회주 숭명사에서 무쇠로 만든 종

.2차대전 당시 일본군이 병기를 만들려고 부평 병기창에 갖다놓은 것을 광복 후에 옮겨놓았다.

종의 정상부에는 두마리 용으로 이루어진 종고리가 있다.

몸통 위부분에는 8괘가 있으며, 그 밑으로 종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각각 8개의 정사각형을 돌렸다.

정사각형 안에는 명문을 새겼는데, 중국 하남성 백암산 숭명사의 종이라는 것과

북송 철종 4년(1097)에 주조되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범종 & 법고

범종은 땅 가까이에 매달려 있어서 종소리가 땅 속 깊은 지옥까지 울려 퍼지도록 해서

지옥의 중생들을 꺠우치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법고는 법을 전하는 북으로 땅 위의 중생을 깨우치는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정족산사고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장소입니다 

 

 

부도전

 

 

 

 

 

죽림다원

 

 

 

 

 

 

 

한국 천주교 최초의 순교 성지 전동 성당

 

전주 전동성당은

백년전통을 간직한 순교 일번지로서 로마네스크 건축양식으로

동양 최고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성당

1791년 신해박해대 윤지충(바오로) 권상연(야고보)이 서슬퍼른 칼아래 참수형을 당한

한국 최초의 순교터에 세워진 성당으로 1981년 국가지정 사적299호입니다

 

그후 백년뒤 1891년 프랑스신부 "보두네"가 대지를 구입

1908년 푸아넬신부의 설계로착공 7년만인 1914년에

많은 우여곡절 끝에 외형공사를 마쳤고.모든시설을 완비하고

축성식을 가진것은 1931년으로 완공까지23년이 걸린 대역사였습니다.

.

 

 

전동성당은  호남지역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다

로마네스크 양식 건물이며, 중앙의 종탑과 양쪽 계단에는 비잔틴 양식의 뾰족 돔을 올렸으며

성단내부에도 비잔틴 양식이 녹아 있다

한국의 교회 건축물 중 곡선미가 가장 아름답고 웅장하여 화려한 건물로 손꼽히고 있다

 

 

전동성당은

 풍남문 밖에서 이슬처럼 사라져간  순교자의 피와 영혼이 그대로 묻어있는 성벽의 주춧돌을 옮겨와

성당의 주춧돌을 삼음으로서 순교자의넋을 간직한 성당으로

천주교의 아품과 역사를 고스란히간직하고있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아름답고 웅장한 성당이다

천주교 사상 최초 순교자였던 윤지충의 순교지였던

풍남문 성문 밖 바로 이 터에 순교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성당이 지어졌다고 한다

 

서울 명동성당의 내부 공사를 마무리했던 프와넬 신부의 설계로 보두네 신부가

1908년에 착공하여 7년만인 1914년에 우여곡절 끝에 외형공사를 마쳤다

벽돌은 중국인 인부 100여명이 직접 구워서 썼고주춧돌은 풍남문밖 성벽의 돌을 가져다 썼다

 (전동성당 홈페이지 발췌)

 

 

 

 

 

 

 

성당 내부

 

 

순교자 권상연과 윤지충,유중철, 이순이 동정 부부를 채색화한 스테인드글라스

 

사제관

 사제관은 본당을 세운 뒤 2대 주임신부였던 라크루신부가 1926년에 건축하였다

사제관은 르네상스 양식을 바탕으로 로마네스크 양식을 가미한 절충식 건물로

전동성당의 동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북향하고 있다

1층 부분은 깬돌 허튼층쌓기를 하였고

2 ,3층 창대에는 화강석을 설치하였고 창틀외곽은 벽돌로 리아스식 쌓기를 하였다

(홈페이지 발췌)

 

 

성당의 뒷 모습

 

한국최초 순교터 표석: 정문우측

 

초대신부  보두네 (윤사물)신부  흉상

한국 최초 순교자 윤지충(바오로) .권상연(야교보)상 

 

 

피에타 상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상  (로마 베드로 대성당)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의 시신을 끌어안고 있는 성모상,

이탈리아어로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

 

 

 

 

 

전주 전동성당 서울 명동성당, 대구 계산동 성당 함께

대한민국 3대 성당으로 손꼽히는 곳으로

명동성당은

고딕양식 으로 수직 수직효과를 강조한 아버지의 모습이라면

 전동성당은

 비잔틴 풍의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고풍스럽고 곡선미가 아름다운 어머니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성당의 내부 장식물은 로마에서 직접가져왔다고 한다

밤의 정동 성당은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룬

 성당의 옆모습

 

성당 뒷편에 있는 ` 한국최초 순교자 기념관

 

 

 

 

 

 

전주시  교동 전주성심여교 교정에는 NON SIBI라고 새겨진 비문이 세워져 있고,

그 받침목에는 眞善美 라는 세글자가 세겨져 있다.

 

 

'Non Sibi'는 본래 라틴어로서

'나를 위하지 않는' '나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만을 위해서가 아닌' 이라는 말이다.

이는 생명을 바쳐 사람을 섬기려 오신 예수님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하느님을 닮은 聖心人을 육성하고자 하는 이 학교의 교훈이라고 한다.

 진선미(眞善美)에는 이 'Non Sibi 정신'이 베어 있습니다.

 

 

 

 

 

 영화 `약속`을 기억하는가

1998년 전도연과 박신양 주연으로 개봉한 영화<약속>은

조직보스인 '박신양'과 의사인'전도연'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담은 내용으로

영화속 결혼식 장면은 주인공 박신양이 경찰서로 자수하러 가기전 둘만의 결혼식을 올리던 장면으로

엔딩씬으로 사용되어 화제를 나은곳이랍니다

 

 

풍남문은 한국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과 권상연 그리고 호남의 사도 유항검과

 초대 전주 지방 교회의 지도급 인물들이 처형된 곳이다

 

경기전에서 바라보는 전동성당은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와 서양문화 융합의 상징이 되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천주교 순교자 124명의 시복을 위해 8월에 우리나라에 옵니다

시복이란

천주교회가 거룩한 삶을 살았거나 순교한사람을 복자(福者)로 선포하는것을 말한다

복자는 성인(聖人) 바로 전단계로 로마교황청에서 매우 엄격한 심사를 거쳐 시복을 결정합니다

이중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윤지충입니다 전동성당은  그가 순교한 자리에 세워졌어요

 우리나라는 김대건 신부를 비롯해서 103명이 1984년 에 성인( 聖人)으로 추대되었습니다

 

전주지역  한옥마을 답사

 

  답사코스 

* 한옥마을(오목대.태조로.경기전,어진박물관.학인당)

* 한국 최초 천주교 순교지 전동 성당

* 덕진연꽃공원( )

 

 

 

 

 

 

 

 

오목대(梧木臺)

고려말 이성계가 남원 운봉 황산에서 왜군을 무찌르고 돌아가든중  조상인 목조가 살았던

이곳에 들려 승전(勝戰)을 자축하던 곳으로  조선을 건국후 세웠다

오목대

 

 

 

 

 

 

 

 

 

 

 

 

 

오목대를 내려오면 한옥마을의 척추라는  태조로로 이어진다

 

 

 

 

 

 

김석조 지도교수님께서 한옥마을 지도를 회원들에게 일일히 직접 챙겨주시고....

 

꼬마야 !  최고의 피서.  엄청 시원하겠네....

 

 

 

 

 

 

 

 

학 인 당

전주대사슴놀이의 명맥을 잇기 위해 전주 만석꾼 백낙중선생이 백미8천석과

 연인원4천명을 동원 건립하고 판소리 공연장으로 만들었다

백범 김구선생이 묶었던곳으로 유명하다

부속건물인 행랑이 붙어 있는  솟을 대문 과 효부 열녀 정려각이 있으며.

홍살문이 갖추어진 전형적인 조선시대 사대부 가옥의 전통가옥이다

 

 

 

 

강암 서예관 에서

무더위에 지친 회원님들   시원한 냉방에서  땀도식히고 휴식 ....

 

 

 

 

점심은 거금  만오천원짜리 석(떡)갈비에 연밥으로 최고의 식사로 (전주최고의식당)

밖에는 대기손님 50m나 줄서있고....

 

 

 

식당 천정 상량모양이  오목대정자 설계와 비슷하네

 

전주 경기전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모신 곳이다.

태종은 1410년 전주· 경주· 평양에 태조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를 모시고 어용전이라 하였다.

그 후 태종 12년(1412)에 태조 진전이라

부르다가 세종 24년(1442)에 와서 전주는 경기전, 경주는 집경전,

평양은 영흥전으로 달리 이름을 지었다.

경기전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광해군 6년(1614년)에 다시 고쳐 지은 것이다.  

 

 

 

경기전 안내도..

정문에서 태조의 초상화를 모신 ③정전까지는 일직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정문을 들어서서 홍살문을 지나 외신문과 내신문 두 문을 지나면  정전이 있다.

정전 영역 왼쪽에 ④영역은 부속건물들이 있고, 오른쪽에는 ⑤전주사고와 ⑥예종대왕 태실이

있으며, 뒤에는 ⑦조경묘와 ⑧어진박물관이 있다.

 

정문에서부터 일직선상으로 홍살문 - 외신문 - 내신문 - 정전으로 이어진다.

 

 

 

경기전 정문.

 

 

 

경기전 정문 앞의 모습.

정문 앞쪽에 수문장처럼 서 있는 비석은 하마비(下馬碑)다.

 

 

경기전 하마비..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22호.

이 곳은 조선 태조의 어진을 모신 곳이니 지나가는 사람은 말에서 내리고 아무나 출입하지 말라는

뜻이 새겨져 있다. "至此皆下馬 雜人毋得入(지차개하마 잡인무득입)"

 

 

다가서서 본 외신문. "동입서출(東入西出)"이 원칙이다.

가운데 문은 신이 다니는 길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양쪽 협문으로 다녀야 된다

 

내삼문을 들어서서 본 정전(正殿).

안에는 태조 이성계의 어진이 있다.가운데 신도(神道)라는 팻말이 보인다. 

가운데 길은 태조 이성계의 혼령인 신이 다니는 길이라는 뜻이다.

 모든 사람들은 마당 양쪽길로 다녀야 된다. 마당의 가마솥이 눈길을 끈다.

경기전 정전(正殿)..보물 제1578호.

안에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어진이 있다. 왕릉의 "정(丁)"자각과 같은 구조다.

정전에 모셔진 태조 이성계 어진..국보 제317호

이 어진은 조선 태조 이성계를 그린 초상화다. 경주. 평양 등지에 모셨던 어진은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버리고, 전주 경기전 어진만이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이라고 한다

 

 

마당 양쪽에 놓여있는 이 가마솥은 물독이다.

옛날에 물독을 "드므"라고 불렀다.

경기전은 화재에 취약한 목조건물이므로 일종의 방화수로 두는 것인데

화마가 밤에 몰래 왔다가 물드므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고 도망가라는 뜻이다

예종대왕 태실..전라북도 민속자료 제26호

옛날에는 왕손으로 태어나면 그 태도 이런 대접을 받았다

 

 

 

 

 

어진박물관

 

 

어진박물관에 봉안되어 있는 태조의 어진. 이 어진은 모사본이다.

일월오봉도(日月五峰圖

해와 달은 음양을 상징하며, 다섯봉우리는 오행을 상징하며,

이런 음양오행들은 곧 우주를 의미하고 이런 우주의 생성과 변화 음양오행을 대변하는 상징물들을

주관하는 그림의 주인공인 국왕은

 곧 우주의 주재자 또는 우주의 주재를 대신하는 존재와 같은 의미를 부여받을수 있었다.

 

 

어진박물관

어진박물관에 봉안되어 있는 태조의 어진. 이 어진은 모사본이다.

 

 

어진박물관에는 역대 임금의 어진도 볼 수 있다.

 

 

사고(史庫)는 왕조실록을 봉관한 곳이다

지금 이 전주사고에는 실록은 보관되어 있지 않고, 실록에 관한 여러가지 기록이 전시되어 있다.

 

 

 

 

 

 

 

조경묘 앞에도 홍살문이 있고 홍살문 왼쪽에 하마비가 서 있다.

태조 이성계의 시조를 모신 곳인데 누가 감히 이 앞에서 말을 타고 거드름을 피울 것인가~!!!

그러나 조경묘는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일반인 출입금지다

 

 

 

 

100년이 넘은 매실나무

 

 

 

아름다운 대나무숲 드라마 " 궁 "의 촬영지

 

 

경기전 서쪽(왼쪽)에 있는 부속건물들

제기고..

제사 때 사용하는 그릇이나 기구를 보관하는 장소다

 

 

 

어정(御井)..임금의 음식을 만들거나 임금이 마실 물을 기르는 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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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경사(寶鏡寺)

 

보경사는 불국사의 말사(末寺)로  신라 진평왕25년(AD603년) 지명법사에 의거 창건

지명스님의 팔면보경을 묻고 그 위에 금당을 세워 절을이룩한뒤 

보배거울(鏡)을 묻었다하여 보경사(寶鏡寺)라한다

 

 

 

설화에  등장하는 두거울은  불가에서 거울을 진리에 비유하고 

팔면경과 십이면경은 불교교리의 획심을 이루는

팔정도(八正道)와 십이연기(十二緣起)를 각각 은유한것이 아닌가한다

 

 

현존 당우로는 대웅전 · 대적광전 · 영산전 · 팔상전 · 명부전 · 산신각 · 천왕문 ·등이 있으며,

 중요문화재로는 원진국사비(圓眞國師碑보물 제252)와 보경사부도(보물 제430), 11기의 부도 등이 있다...

 

 

 

 

 

 

 

 

 

 

 

 

 

 

첫관문인 천왕문 은 신방묵에 조각된 사자상 문양이 특이하다

 

적광전

 

 층석탑

 

 

오층석탑에서 중요한 부분은

1층 몸돌앞뒤에 새겨진 연봉 자물쇠하나 와 동그란 문고리 두개가 드르라지게 새겻다

 

 

 

 

 

 

원진국사비

 

 

 

원진국사부도

 

 

 

 대웅전

 

 

 

웅전 뒤편으로는 조선 숙종3(1678)에 건립한 명부전,

석가세존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모신 영산전,

  1678년 학열 스님이 화주하여 세운 원진각,

1914년에 이전한 산령각, 1678년 지총 스님이 화주하여 세운 팔상전과 미술관이 자리하고 있다...

 

 

 

 

 

 

 

 

 

 

 

 

 

 

 

 

 

 

 

 

 

 

 

 

 

 

 

 

 

옥산서원(玉山書院)

 

동방오현(五賢)의 한사람 으로 추앙받는 희재 이언적(李諺迪)을 배향하는 서원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는 회재 이언적선생의 고향이자

옥산서원은 회재 이언적(1491~1553)을 배향하는 서원으로 그의 사후인 선조 5년인 1572년에

경주부윤의 이제민이 지방 유림들과 함께 세웠다.

옥산서원 입구에서 150m의 진입로는 자계천을 따라 늘어선 나무들이 숲길을 이루어 햇볕 한 점 들어올 틈이 없다.

시냇물 소리가 은은하게 울려퍼지는 이곳 옥산서원은 그야말로 낙원이 따로 없을 것 같은 곳이다

 

 정문에는 ‘역락문(亦樂門)“의 현판이 걸려 있다.

이는 논어의 학이편에서 '유붕이자원방래 불역락호아(有朋而自遠方來 不亦樂乎)'에서 따왔다한다.

그 뜻은 서원을 찾는 손님에게 더 없이 정답고 편안하다는 의미로 당대의 명필가 한석봉의 필체라 한다.

 또한 유생들의 휴식장소인 무변루와 강당인 구인당의 필체도 한석봉의 글씨이다.

 

 

구인당의 맞은 편에 흰바탕에 검은 글씨인 옥산서원의 현판 글씨 또한 추사 김정희의 필체이다.

 

한석봉의  필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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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산서원을 나와 회재 이언적선생의 사랑방이었던 독락당을 가기위해서는

도덕산과 봉좌산 그리고 어래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이 모여드는 자계천을 건너야 한다.

암반을 타고 흐르는 자계천에는 작은 폭포를 이루고 ‘ㄷ’ 모양의 소는

금방 용이라도 튀어 나올 것 같은 스산한 느낌이다.

회재이언적은 이곳에서 매일 얼굴만 세수 한 것이 아니고 마음도 딱 고 씻었다 한다

 

지금도 암반에 ‘세심정’이란 글귀가 뚜렷하다

 

 

 

 

독락당(獨樂堂)

 

희재는 장년시절주앙정계에서 밀려나 자옥산 골짜기에 7년간을 은거하였다

그가 살든집의 사랑채가 독락당이다

 회재선생의 거처인 독락당의 입구

 

 

 

 

 왼쪽은 사랑채쪽의 담장, 오른쪽은 숨방채(행랑채와 비슷)쪽의 담장이다.

담장 끝에는 계곡이 나타난다.

 

 

 

 정혜사지13층석탑 (국보 40호)

 

 

 

 

독락당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정혜사지가 있는데 지금은 아무 것도 없고, 탑만 남았다.

조선시대 각종 문헌에 아름다운 절이라고 칭송한 시도 있다는데...

지금은 정혜사지 13층 석탑만 남았다.

 

국보 40호 정혜사지13층 석탑

이런 형식의 탑은 전무후무하며, 다소 현대적인 미적감각도 가진 탑이다.

아무리 보아도 심심하지 않은 석탑이라 쉽사리 발길을 돌리는 게 쉽지 않은 석탑이다.

 

 

특이한 점은 저렇게 멋진 탑을 만들고 기단은 그냥 흙으로 돋았고, 그 아래 막돌쌓기하였다는 점인데...

토축, 막돌쌓기로 엉성한 듯한 기단부와 파격적인 미를 자랑하는 탑이 약간은 부조화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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